제자들이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과 한때 어울렸던 자신들까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지 않고 모여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짧은 시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받았던 참 평화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함께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분이셨고, 그렇다고 떠나기에는 너무나 평화로운 분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처음으로 하신 일은 바로 ‘평화’를 건네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곳에는 창으로 찌른 상처, 못 박은 상처가 있습니다. 피고름이 흐르고 역겨울 정도로 악취가 났을 것입니다. 그분이 제자들에게 건넨 평화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에찔리며 죽음으로써 성취한 평화입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상태의 평화가 아닙니다. 그런 평화는 로마와 야합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주겠다는 평화입니다. 그들은 민족의 평화를 위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 11,50). 사실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11,47)에게 더 나은 선택을 한 것뿐임에도 그들은 “이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11,48)을 위한것이라고 내세웁니다. 거짓 평화는 그렇게 뻔뻔하기까지 합니다. 한참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무능보다는 차라리불의와 부패가 낫다’고, 거짓 평화의 빵부스러기로 수많은 사람의 삶을 비루하게 만들면서 우리 국민이 정직할필요가 있다고, (탐욕과 불의는 숨긴 채) 금수강산 이 땅을지키고 이 민족의 번영을 위해서라며 산하를 파헤치면서보잘 것 없는 몇몇 사람쯤 죽음(희생)에 이르는 것은 어쩔수 없다고, 그렇게 태연히 훈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평화를 ‘정의와 사랑의 열매’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그리고 그분의 손과 옆구리에남아있는 피고름과 악취 나는 상처야말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의 절정, 곧 참 평화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의죽음은 지도자들의 불의와 탐욕을 만천하에 드러냈기에 정의의 절정이며, 당신이 벗으로 삼았던 그 많은 하찮은 이웃을 죽음의 순간까지 배반하지 않았기에 사랑의 절정입니다.
그렇게 귀하게 얻은 평화를 이제 제자들에게 건네주시며 제자들을 파견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0,21). 오늘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면서 이 땅의그리스도인을 정의의 사도, 사랑의 사도, 참 평화의 사도로 초대하고 파견하십니다.

“가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나눕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 / 신수동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