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 전교 주일
제1독서(이사 2,1-5) 제2독서(로마 10,9-18) 복음(마태 28,16-20)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10-21 [제3116호, 15면]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부활 후 제자들과 함께 했던 삶을 마무리하시고 떠나시기 직전,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었던(마태 17,1) 그 산에서 열한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는 장면이요 마태오 복음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기도 합니다. 2독서와 복음은 오늘날도 신앙의 은총을 사는 이들의 귀에 쟁쟁하게 울려 온 몸을 전율케 합니다. 이보다 거룩하고 절실하며 아름다운 소명이 또 있을까요? 몇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우리의 사명을 더 깊이 만나면 좋겠습니다. 

“엎드려 경배하였다.”(17절) “경배하다(프로스쿠네오 προσκʋνέω)”는 ‘무릎을 꿇다, 절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신적 현현에 대한 인간의 자세로서 자신의 소속과 신뢰를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이 순간에도 믿지 않는 이가 있다 하니, 온전히 신뢰할 수 우리가 얼마나 큰 은총 안에 있는지, 또 그 은총에 응답하는 삶이 얼마나 풍요로운지 새삼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권한”(18절)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힘, 능력’을 의미합니다. 

의심하는 이가 있음에도 예수께서는 탓하거나 망설임 없이 바로 모든 이를 향한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능력이 아닌 주님의 능력으로 세상에 복음을 외치기 때문이고, 또 처음에 희미했지만 함께 동참함으로써 점점 선명해지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포하는, 곧 외치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큰 선물을 자신 안에 묻어둔다면 그 가치를 알 수도 없고, 얼마나 강한 빛인지도 알지 못하며 그분의 가르침으로 일상의 삶을 수놓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이렇듯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선교의 삶은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이 나를 변화시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19절) 아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원래 하늘에 계시던 말씀이 몸을 취하여 우리와 함께 계셨던 그분이 하느님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인간으로 신비 중에 신비입니다.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분을 통하여 그 친교에 들어갑니다. 인격적 주체로 아버지와의 관계 안으로 들어가 친교를 나누는 일, 구약과는 전혀 다른 새로움입니다.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20절) “가르치다(디다스코 διδάσκω)”는 삶의 방식에 대한 양성의 의미에 더 가까운 단어이며, ‘제자로 삼다’와 연결됩니다. 세례로 출발한 믿음의 여정은 제자로서 양성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20절). 묵시문학적 표현인 “세상 끝날까지”는 저 마지막 날을 기다리게 하는 희망의 전언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과 서로 인격적 주체로 서로가 서로에게 머무는 희망의 소식입니다. 이 상호현존의 친교는 성령(사랑)으로 가능합니다. 

안토니오 콘치올리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

우리의 선교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는 은총을 세상에 전하는 일입니다. 이 은총을 필요로 하는 이들은 세상에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을 만나 하늘 큰 가족을 이루는 사명입니다. 대단한 능력이나 다른 어떤 힘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그 부모로부터 이름을 받고 그 이름에 평생 대답하듯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그분들의 이름을 받는 것입니다. 

자녀로서(성부), 신부로서(그리스도), 역동하는 사랑(성령)의 관계가 세례명에 새겨져 있고 우리를 끊임없이 부르고 있습니다. 결국 이 사명은 먼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고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이 공동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제자 됨의 삶을 제도 안에서 안주하는 모습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직무에 따른 섬김의 의무를 특권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부끄러운 것입니다. 강론이 말씀으로 선포되지 않는다면 참된 제자 양성에 희망이 없습니다. 좋은 차를 타고 멋을 내며 가난한 자들에게 다가간다면 그들은 말씀을 거부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신자 가정이 한 달 동안 애써 노력한 대가와 지출해야 할 곳을 두고 고민하고 지혜를 모으고 있는지, 신앙생활의 유지를 위해 기본적인 것을 제외하고도 얼마나 많은 곳에서 요구를 받고 있는지, 왜 가난한 자들이 성당의 문턱이 높다고 말하는지, 그들이 교회의 문 앞에서 망설이는지 그 진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가난하여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제도로서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자존감이 상처받지 않도록 먼저 살피고 배려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우리 인간을 위해 먼저 가난해지셨듯이 그들을 위해 교회의 문은 낮아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가난을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는 복음을 위해 셈하고 계획하는 적극적 의지의 표현입니다. 

지금 가난한 곳 중 하나가 바로 가정입니다. 현대 복음선포에서 가정은 그 중심에 있고, 가정은 ‘교회의 길’이라고 교회문헌들은 외치고 있습니다. 가정에서 우리는 신뢰라는 단어를 배웁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안다면 하느님이 아버지요 교회가 어머니라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몸이 사랑의 언어라는 것을 안다면 그리스도가 당신 몸을 우리에게 내어줌으로써 이루어지는 사랑의 일치와 생명의 성장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의 본질을 흔드는 물질 우선주의와 편리함 등에서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노아의 배를 건축해야 합니다. 노아는 세상의 방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시에 따라 큰 홍수에 버틸 수 있는 배를 건축했습니다. 교회는 믿는 이들의 가정이 세상의 홍수에서 지킬 수 있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늘 그랬듯 복음 선포는 어려운 문제나 장애로 말미암아 좌절되거나 멈추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찾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선이 더 크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슴을 뛰게 하는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임이 필요합니다.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 말씀을 전해주는 자가 가장 고맙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2독서, 17절) 나누게 되면 점점 더 많이 가지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루카 19,26). 말씀도 사랑도 그렇습니다. 구원의 완성을 위해 복음은 먼저 자신에게 지속적으로 전해져 풍요로워야 하고 그리고 비출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는 작은 빛도 세상에는 희망이 됩니다. 일어나 걸어야겠습니다. 그분께서 열매 맺을 수 있도록 말입니다.



김혜숙(막시마) 선교사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신학과 교황청립 안토니오대학 영성학과를 졸업하고,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이며, 대전가톨릭대 혼인과 가정대학 신학원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 Peace be with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