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겸손과 선물

주님 세례 축일
제1독서 (이사 42,1-4, 6-7) 제2독서(사도 10,34-38 또는 티토 2,11-14; 3,4-7) 복음(루카 3,15-16,21-22)

가톨릭신문 발행일2019-01-13 [제3128호, 15면]

역효과의 법칙이 있다. 우리는 수면에 떠 있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가라앉는다. 그러나 가라앉으려고 하면 오히려 떠오른다. 우리가 무엇을 하려고 애쓰는 순간 우리는 반대의 효과를 만나게 된다. 이것을 역효과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결국 자연스러운 흐름에 몸을 맡길 때 우리는 수면에 떠 있을 수도 있고 가라앉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다. 누군들 물에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유영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어찌 보면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부단한 발버둥을 통해 얻게 되는 결과 혹은 경지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것은 스스로 기약(期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배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그 일을 해내는 사람이 있다. 공자는 이런 사람을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라고 불렀다. 나머지는 ‘배워서 알거나’(學而知之者), ‘발버둥을 치고 노력해서 아는 사람’(困而知之者)이다. 그러나 공자는 중요한 것은 나면서부터 알든, 배워서 혹은 억지로 노력해서 알든 결국 알아야 할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동일하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안 사람을 넘어 나기 전부터 아신 분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일을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신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하느님의 일을 자연스럽게 이루는 것이나, 혹은 태어나면서 아는 자(生而知之者)들의 순리에 따른 행동이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런 사람은 사람이라기보다 기계에 가깝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피와 땀을 흘린 일화를 보면 예수님의 자연스러움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나면서부터 아는 이들의 자연스러움은 노력의 자연스러움이다. 이 자연스러움이란 매시 매초 멈추지 않고 들려오는 하느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자기 비움이며 겸손이다. 자기를 비워야 하느님 소리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노력의 자연스러움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하나에 만족하지 않으며 지나간 과거에 우쭐하지 않고 미래를 예단하지 않는다. 그래서 겸손하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외치고는 그것만을 고집하는 것은 참다운 진리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소개할 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하신 것도 같은 이유다. 먼저 ‘길’을 가야 하고 그 와중에 진리를 만나는 것이다.

간혹 한 번의 깨달음으로 진리를 알았다고 우쭐대는 사람들이 있다. 겸손치 못한 사람들이다. 개량한복을 입고는 마치 인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도 있고 때론 머리 깎고 승복 입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제복이나 수도복을 입고도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가르치려 드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에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치는지를 모르거나 혹은 외면하거나 아니면 끝없이 답을 찾아가는 삶에서 도망친 자들이다. 그들이 진리를 한 번 마주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붙잡은 진리는 참다운 진리가 아니다. 그렇게 붙잡을 수 있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명나라 때 왕양명이라는 사람은 그런 진리를 ‘광경’이라고 불렀다. 헛된 그림자, 혹은 찰나에 사라지는 풍경일 뿐이라는 의미다. 참다운 진리를 안 사람은 하나의 광경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스스로 자부하지 않는다. 스스로 “나는 깨달은 자요”라고 교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깨달았다고 여긴 것은 다시 한순간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의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


오늘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 눈길이 가는 것이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께서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될 일을 하신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인간에게 세례를 받는 것은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되는 일이다. 하느님의 아들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세례, 새로 태어남의 세례다. 그것은 예수님의 비유대로 깨끗이 몸을 씻었는데 또 씻는 것과도 같다.

이처럼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되는 일들이 복음서 곳곳에 등장한다. 예수님의 탄생도 그러하다. 석가모니는 왕궁에서 태어났다. 그것이 그의 깨달음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굳이 인간의 처소가 아닌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 버젓하지는 않아도 아기 누울 자리는 마련됐어야 했다. 좀 지나치다 싶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 절정에 있다. 인간의 ‘정의’로 말하자면 그분의 죽음은 결코 정의롭지 못했는데 그분은 감행하셨다. 오늘의 세례뿐 아니라 예수님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하나의 역행이며 전복이며 치열함이다. 이러한 역행이나 전복은 스스로를 믿고 하느님 행세를 하려는 인간의 자만을 각성시키는 자비롭고 겸손한 초대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하신 말씀처럼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준 것”(요한 13,15)이다. 극도의 낮아짐과 애씀으로 인해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감행하신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활의 시작, 그리고 죽음에 이르도록 일관된 키워드, ‘겸손을 통한 하느님의 자비하심’이다. 이 겸손은 자부하지 않는 까닭에 오늘 하느님께서 대신 그분을 들어 높여 주신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 3,22) 우리들이 개인적으로 깨달음이나 선행 등을 이유로 자만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가끔 겸손을 내세우면서 칭찬을 구하고, 사랑을 내세우면서 대가를 바란다. 진정한 겸손과 사랑은 인간이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알아주시는 것이다. 나의 겸손과 사랑을 스스로 자부한다면 혹은 누군가에게 칭찬과 대가를 구한다면 그의 겸손과 사랑은 그것으로 사라진다. 스스로 구했으므로 구한 것을 얻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다. “그들은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다.”(마태 6,2) 하지만 진정한 겸손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 때문에 영원하고 그 자체로 남는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부하지 않으셨고 하느님께서 대신 “너는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라고 그분을 높여주신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부족하다. 가장 큰 어려움은 언제까지 노력해야 하는가이다. 주님의 세례 축일을 경축하고 기념하는 오늘, 우리의 노력이 예수님의 겸손과 닮아 있길 희망해 본다. 우리의 구원 혹은 그분의 자녀가 됨은 우리의 겸손한 노력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이지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전리품이 아니다. 우리가 비록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은 아니지만 겸손한 노력을 통해 도달되는 지점은 예수님의 그것과 같다. 그것은 선물이며 그것을 희망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그래서 우리의 노력은 머물지 않는 희망찬 노력이어야 한다.



서광휘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기획처장)
중국 북경대학교에서 중국철학 박사를 취득하고 현재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임하면서 기획처장과 교학처장을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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