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증언, 알리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부활 제3주일
(사도 3,13-15.17-19 / 1요한 2,1-5ㄱ / 루카 24,35-48)

‘샬롬’은 목숨을 내어주는 예수님 사랑으로 주어진 것
부활하신 주님의 손과 발을 만진 증인들다운 삶 살길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04-15 [제3090호, 18면]

시몬 체허비즈의 ‘그리스도의 부활’.

보이지 않고 잡히지 않는 것이었는데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흔적을 남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무엇인가와 헤어지거나 이별할 때가 되면 그제야 비로소 그 존재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들, 예를 들어 진심, 배려, 존중, 사랑, 희망 같은 것….

부활 이후 승천이라는 또 다른 사건을 향해 점차적으로 나아가는 부활 제3주의 본문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과 함께 했던 시간들 속에 남겨진 그 흔적들을 소중히 간직한 ‘증인’이 되어주기를 당부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분을 깊이 알아온 시간이었기에, 그분이 보여주신 일상의 빛과 희망, 수난과 죽음, 그리고 이어진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 이번 주 본문들이 전해주는 가르침입니다.

■ 본문의 맥락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으로서, 승천 이야기 바로 앞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했던 ‘공동체 생활’은 루카 복음이 특별히 부각시킨 주제 중의 하나인데, 복음서의 결론 부분에서도 이러한 공동체성이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제자 공동체가 함께 모여 있을 때에 나타나시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식사를 하시는 장면으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는 문장은, 공동체 생활로 알게 된 예수님의 모든 것을 증언하라는 루카 복음의 결론에 해당됩니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증거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책 1부에 해당하는 복음서를 ‘증인이 될 것’에 대한 촉구로 마무리한 루카는, 책 2부(사도행전) 서두에서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증인들과 그들의 증언을 소개합니다. 베드로와 제자 공동체의 증언, 그리고 스테파노의 순교입니다.

■ 서로를 깊이 알아온 시간

루카 복음에서도(요한 복음에서와 같이[요한 20,19.21.26]),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분이시고 이 평화는 죄의 용서를 통한 하느님과의 화해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히브리어 ‘샬롬’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사랑이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해서, 자의로든 타의로든 그 어떤 투쟁이나 전쟁도 더 이상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실 우리 안의 죽음과 지옥은 무엇과 싸우거나 증오로 무너질 때 생겨나는데, 그 싸움 대부분은 소유할 수 없어서, 아니 어쩌면 소유했지만 그것에 만족할 줄 몰라서, 그렇게 여전히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용서할 수 없어서 일어나는 비극입니다. 그런데 목숨을 내어주는 하느님의 사랑을 만났을 때 문득 그 모든 싸움을 철회하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게 되는 의외의 평정심과 순함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유는 원하는 만큼, 결핍됨 없이 사랑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말하고 있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에 들어 있는 ‘샬롬’이 그런 상태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샬롬은 예수님의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주어졌다는 것이 그리스도교 믿음의 기조인 ‘케리그마’이며, 이를 선포하고 알리는 것이 ‘증인’의 역할입니다.

오늘 복음은 특별히, 인간을 온전한 구원의 상태로 이끌어주는 이 케리그마에 대한 증언이 보다 확실한 것이 되게 하려고, 부활하신 분의 몸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부활이 결코 영적인 의미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며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24,39)라고 하신 점은 얼마 전 손과 발을 십자가에 못 박히고 무덤에 안장되셨던 바로 그분이 지금 제자들 앞에 나타난 분과 동일함을 확인시키는 리얼리즘적 장치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신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24,42) 음식을 드심으로써 공동체 생활 때의 일상을 다시 한 번 재현하십니다. 외적 모습뿐 아니라 일상적 태도까지 동일 인물임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 무지에 대한 단죄가 아닌 사랑

제1독서의 내용은 ‘증인’이 증언해야 할 내용이 케리그마 이외에 무엇이 더 있는지를 알려줍니다. 베드로는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사도 3,2)을 치유한 후, 이 놀라운 기적이 예수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이 이 사건에 어떻게 영향을 끼친 것인지를 증언합니다.

베드로의 증언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살해한 이들에 대한 사랑과 구원 의지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매우 신랄한 어조로 인간들의 과오와 죄를 고발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고,…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3,13)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3,14)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3,15) 그러나 동시에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3,17)고 함으로써 인간들이 범한 행위가 악의로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고 안심시킵니다. 루카는 예수님이 같은 내용을 십자가상에서 이미 언급하신 바 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리스도를 살해한 것,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려고 하신 하느님의 뜻을 거절한 것은 돌이킬 수 없이 심각한 죄이지만 오히려 하느님 측에서는, 인간의 무지와 거절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당신의 의지를 한결같이 드러내는, 즉 그분의 변함없는 구원계획을 가장 장엄하게 선포하는 공식적 사건이 된 것입니다.

■ 제물이 되기를 자처한 사랑

제2독서에서도 요한은 예수님의 또 다른 속성 하나를 증언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너무도 큰 은총과 자비를 입은 인간이기에 더 이상은 죄를 짓지 말아야 마땅하지만 나약함과 한계 때문에 인간은 다시 죄에 떨어지는 잘못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주시는 분”(2,1)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는 것, 그분은 우리의 변호인이면서 동시에 “속죄제물”이 되셔서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이 증언의 핵심입니다. 속죄제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힐라스모스’는 누군가를 달래고 진정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 혹은 물건을 말합니다. 우리를 변호하시기 위해 당신을, 아버지 하느님을 달래는 도구로까지 만드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감히, 아무도, 그 무엇도, 방해하지 못하는 강건한 사랑만이 그 사랑을 증언하게 합니다. 세상의 비웃음과 박해의 위협을 견디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했던 제자들의 힘은, 사실은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의 제자들이 그토록 훌륭한 증인이 될 수 있도록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며 항구하게 사랑하셨기에 가능했던 혁명이었습니다.

자신을 살해한 인간들의 죄를, 몰라서 그런 것이라고 변호하며 스스로 자청해서 제물이 되기까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착한 사랑에 대하여, 여전히 낯설어하고 난처해하며 결코 믿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그 사랑의 진정성을 또 다른 사랑의 빛으로 증명하는 것, 이 경이로운 사랑과 구원의 현실에 대하여 하느님의 손과 발을 만지고 얼굴을 마주한 증인들답게 살아가는 것, 부활이 우리에게 촉구하는 자세입니다.



김혜윤 수녀(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로마교황청립성서대학원(S.S.L.)과 우르바노 대학교(S.T.D.)에서 수학한 후 광주가톨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에서 소임하고 있다.

                                                                                                                     " Peace be with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