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나의 믿음에 부활이 담겨있는가?

부활 제2주일 
제1독서 (사도 4,32-35), 제2독서(1요한 5,1-6), 복음(요한 20,19-31)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부활하신 예수님께 응답하며
직접 만져보지 않아도 확신에 찬 고백을 할 수 있길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04-08 [제3089호, 18면]

헨드릭 테르브루그헨의 ‘토마스의 의심’.

오늘 복음은 사실, 제자 토마스를 통해 들려주는 우리 믿음에 대한, 우리 믿음을 위한 말씀입니다. 토마스는 자신의 벗들에게 말할 때(25절)와는 달리,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주저함 없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고백을 가만히 묵상해보면, 그는 부활의 가능성을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확실히 믿고 싶어 조건을 제시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의 신앙도 이런 과정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이 가져다주는 허망함이 더 현실적이라 부활은 그냥 막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몸을 통해 스스로 겪지 않은 죽음과 부활은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너무나 큰 명제입니다. 그럼, 오늘 우리도 토마스가 되어 보는 건 어떨까요? 그리고 망설였던 그가 확신을 얻고 고백하는 과정을 함께 걸어가 봅시다.

저는 여러 곳에서 강의를 합니다. 만약 그날 강의 주제가 부활에 관한 것이라면 형제자매들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육신의 부활을 믿습니까? 믿는 분은 손을 들어주십시오.” 정말 소수의 사람만 손을 듭니다.(3% 정도) 주일과 대축일 미사 때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라고 신경고백도 하고 돌아가신 영혼들을 위한 미사도 봉헌하지만 정작 손을 들지는 못합니다. 믿음이 약해서일까요 아니면 확실한 증거가 없어 망설이는 것일까요? 어쩌면 토마스처럼 ‘나도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25절)고 할 만큼 부활은 우리의 이성과 지성을 뛰어넘는 일이라 그러는 걸까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부활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예수님의 말씀(사두가이들과의 부활논쟁)과 부활하신 그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가르침과 오늘날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몸 신학’ 교리서(제3부 육의 부활)를 통해 우리는 부활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로 합니다. 죽음은 생물학적인 기능의 소멸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는 부르심입니다. 인간은 생물학적인 한계로만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는 매일 체험하고 있습니다.(보이지 않는 영적인 부분이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당연히 생물학적 사건을 넘어 완전한 완성을 향한 전존재의 불림입니다. 소유한 것들을 부르시는 게 아니라 내 존재(몸)의 부르심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몇 가지를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우선 부활의 한 축은 하느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가이들과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능력도 모르니까 그렇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마태 22,29)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이루어지는 복된 친교의 신비는 모든 이해와 표현을 초월한다”(1027항)고 말합니다.

구약시대, 구원 신탁에 대한 유명한 ‘마른 뼈의 부활’ 환시 이야기가 있습니다.(에제 37,1-14) 하느님이 에제키엘에게 “이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라고 물을 때, 에제키엘은 직접적인 대화를 피하고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아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몰라도 창조주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기에 가능성을 열어둔, 하느님의 권능으로 가능함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런 후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에제키엘이 예언하자마자 놀랍게도 뼈들이 진동하면서 연결되어야 할 상대 뼈를 찾아 서로 붙기 시작했고, 그다음 힘줄과 살, 살갗으로 덮였지만 아직 숨은 없었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사방에서 ‘숨’(루아흐)을 모아들이고 이들 위로 불게 하시자 모두 제 발로 일어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 야이로의 딸도(루카 8,54), 나인이라는 지방에서 과부의 아들을 살리실 때도(루카 7,14), 라자로를 일으키실 때도(요한 11,43) 부름이 있었고 그들은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두 번째, 곧 부활의 다른 한 축은 인간 편에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 모두는 분명 죽어 관이나 무덤에 묻혔지만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르는 분과 듣는 이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 오늘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22절)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의 권능과 들을 수 있는 인간과의 관계의 내적 체계가 바로숨, 곧 성령(사랑)입니다. 이 성령을 우리에게 불어넣으셨고(이미 세례 때), 이것이 곧 생명의 원리입니다. 흙으로 만든 인간의 인성 안에 내재된 하느님의 숨결이 부활 때 우리 몸을 영화와 신화에 이르는 능력체계가 되고, 얼굴을 맞대는 말할 수 없는 신비에까지 이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당신의 옆구리에 손을 넣으라 말씀하십니다.(27절) 당신 사랑이 당신 자신의 육체성을 통하여 인간에게 닿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이상적 사랑이 아니라 실제적 사랑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 실존에 새로운 지평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몸이 부활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몸’은 모든 관계성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고, 실제로 우리와 계속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몸은 분명 변화된 몸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나 마리아 막달레나가 바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변화한 부분이 있었다는 것이고, 부르자 바로 알았다는 것은 변화하지 않은 그분의 무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활한 몸은 하느님에 의해 그 질적 특성이 지배되는 몸, 하느님 차원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 몸은 절대적 타자인 하느님과의 궁극적 일치를 위한 표징이자 준비입니다.

부활은 우리 신앙의 기초입니다. 하느님의 능력과 인간이 나누는 내적 힘의 체계, 곧 하느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바로 이것을 고백하고, 제2독서가 그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습니다.”(1절) 변화를 위해 필요한 것은 거듭나는 것, 즉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과 십자가 아래에서 바라보는 고통이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합니다. 물과 피로써 오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6절) 그리고 토마스처럼 직접 만져보지 않아도 우리는 확신에 찬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보지 않고 믿었으니 정말 행복하다.” 오늘 우리는 이 행복을 크게 나눕시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김혜숙(막시마) 선교사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신학과 교황청립 안토니오대학 영성학과를 졸업하고,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이며, 대전가톨릭대 혼인과 가정대학 신학원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 Peace be with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