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5주일을 맞이하는 교회공동체는 그 둘째 독서로 요한묵시록 21장을 읽게 됩니다.앞선 20장에서 묵시록의  저자는 사탄의 멸망과 생명의 책에 따른 심판이라는 어둡고 두려운 주제를 다루고는, 이제 21장부터는 마치 깊은 밤을 지나 새벽이 동터오는 듯한 밝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21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예언서에서 이미 등장 합니다. 먼저 이사야서 65장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그리고 66장에서 이 표현은 또 한번 사용됩니다: “정녕 내가 만들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서 있을 것처럼 너희 후손들과 너희의 이름도 그렇게 서 있으리라.” 그런데 이렇게 이사야서에서 예언되고 묵시록이 이어받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지 하늘과 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 의미하는 바는 ‘온 세상’이며,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새로운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새’ 세상이 전제로 하고 있는 ‘헌(?)’ 세상은 어디일까요? 그 해답은 바로 창세기 1장 1절에서 찾을 수있습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창세기의 서두에서 우리는 이사야서와 묵시록이 말하는 헌 세상을 만납니다. 그 ‘헌 세상’이란 바로 태초의 창조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만들어주신 세상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인해 그 하늘과 땅의 질서가 무너지자 이제 하느님께서 다시 한번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시기를 희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사야서와 묵시록이 꿈꾸는 ‘새 하늘과 새 땅’,즉 성경의 종말신학입니다.
오늘의 독서인 묵시록이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선포한다면, 오늘의 복음인 요한복음 1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새 계명’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계명은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도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로 알려져 있습니다만,성경을 찾아보면 의외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종교임을 분명히 밝히는 신약성경의 몇 대목이 있는데,바로 요한복음 13장의 말씀이 그 대표적 경우입니다.
창세기가 전하는 하느님께서 만드신 옛 세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옛 생명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종말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날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명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옛 세상에는 옛 질서가 있었듯이, 새로운 세상에는 새 질서가 요청됩니다.
그 새로운 질서를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으로 요약하십니다. 이렇듯 부활 5주일을 맞이하는 공동체는 새로움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한 말씀들과 맞닥뜨립니다. 그것은 이사야의 희망이었고, 요한의 희망이었으며,오늘 부활 5주일을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