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저는 친구를 만나러 운전을 하던 도중 의문의 괴한들에게 피살된 군인의 죽음에 대한 다큐멘타리를 보았습니다. 그의 예기치 못한 죽음에 절망에 빠진 가족은 경찰에 심층수사를 의뢰합니다. 하지만 수사는 성공적이지 못 하고, 그 군인의 사체는 부검을 거친 후에나 드디어 안식을 찾게 됩니다. 몇년 후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재 부검이 새로운 단서를 제공할 것이라 믿으며 아버지의 몸을 파내게 됍니다. 관을 개봉하는 것을 지켜 보는 동안, 죽은 군인의 몸이 놀라울 정도로 잘 보관되어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를 감싼 천이며 그의 사체또한 모두 완벽했던 것입니다.
이 다큐멘타리를 보며, 무덤과 사체를 감싼 천과 그리스도의 부활의 연관성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두 이야기가 어떤 면에서 다른지도 제겐 아주 명확히 보였습니다. 그 군인의 사체는 그의 가족이 다시 부검을 원하여 무덤에서 다시 꺼내지게 됩니다. 하지만 군인의 사례와는 사뭇 다르게도, 예수님의 몸은 인간의 의지로 인한 것이 아닌, 하느님의 의지로 비롯된 것입니다. 군인의 경우, 그의 몸과 그를 감쌌던 천은 온전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분을 감쌌던 천만 발견했을 뿐, 그분의 몸 자체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었고, 무덤에서 걸어 나가셨습니다. 무덤 속 천의 존재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마 8:31) 입증하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가장 먼저 찾아 나선 사람입니다. 사실, 그녀는 사도들 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복음을 접합니다. 그녀는 사도들보다도 먼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접합니다. 비록 마리아 막달레나는 열정적인 헌신과 굳센 신앙으로 예수님을 찾았으나, 그녀는 부활하신 분의 현실됨을 과소평가하였습니다. 그녀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즉, 그녀가 멈추지 않고 예수님을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방식은 보다 정화되어야 하고, 정정되어야 하고, 그 무엇보다 영역을 늘려야 했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분은 그녀의 상식과 상상을 초월하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 첫걸음을 내딘 것으로 칭송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 모여 이 이야기를 다시 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인으로써 우리 삶에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헤매었는지 되짚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좋은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 전체가 성스러운 바람, 성스러운 갈망, 저승에 가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을 찾고 또 찾는 것을 행하는 것임을 깨달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통해 행하신 사실들을 너무나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경우에 따라 우리가 하느님을 필요하는 것 보다 그분께서 우리를 더 필요로 하신다는 그릇된 망상 속에 살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 혹은 태도는 전혀 진리에 기반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위해 우리가 필요하시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써 살아가기 위해 하느님이 필요하고, 존재하기 위해 하느님이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삶이야 말로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이상적인 삶입니다.
프레드리히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신봉하는 세계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굳은 신앙과 비어있는 무덤이 우리를 흔들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계신 곳을 열렬히 찾기를 빕니다. 부활하신 분의 존재와 그분의 해방하시는 힘이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이로 삼위일체의 하느님과  우리 모두가 떼어지지 않는 일치를 이루어 내길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