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중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마 이는 우리가 아버지의 감정, 큰아들의 분노 그리고 작은아들의 젊음이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긴박함을 함께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각 인물들이 우리에게 어떤 말을 전달하려는지 알아 봅시다.
문제는 작은아들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기다리지 못한 채, 작은아들은 아버지 재산 가운데 자신에게 돌아올 몫을 달라 요구합니다.
며칠 뒤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 가족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버리고 방종한 생활을 위해 떠납니다. 하지만 그를 너무 비판하지는 마십시오! 우리 또한 집과 가족이라는 것에 얽매어 큰 일을 이룰 수 없다고 느낄때가 있지 않습니까.
큰 일을 이룬 사람들은 모두 다른 곳에 있다 느끼며, 지금 있는 곳엔 희망과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생각하곤 합니다. 비록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내 집”이라는 경계를 벗어나는 자유를 만끽하지 않고선 절망에 빠질 것만 같기도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의 작은아들이 직접 경험했듯이, 우리 또한 넓은 세상이 얼마나 우리 개인의 계획에 무관심하고 얼마나 적대적인지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낯선 이를 온기가 아닌 의심으로 대하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돕지 아니하고 경쟁을 합니다.
우리는 외롭고, 어떤 때에는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되찾은 아들처럼 우리 모두는 생존해 나아가지만,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그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방종한 생활을 할 때, 그는 왜 유대인 공동체를 찾지 않았던 것입니까? 우리가 파괴적인 순환에 빠져있을 때처럼 그는 너무 오만하였습니까? 질투심이 너무 강하였습니까? 혹은 그의 생활이 창피하여서? 이유가 어찌 되었건, 그는 그의 집, 가족 그리고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에서 점점 멀리 떠나갔습니다.
어느 날 그는 단순하게도, “집에 돌아가겠다,” 하고 말합니다. 논리적인 결정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습니다. 수치심, 죄책감으로부터 용서받고 신뢰를 다시 쌓아가기엔 갈 길이 멀었습니다.
우리 탕자들은 이 같이 몹시 고통스럽지만 간단한 선택만이 있습니다. 큰아들은 집에 남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순종, 공손함, 강인한 마음을 가졌고, 미래를 내다 볼 줄 아는 사람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해가 뜨면 밭을 일구며, 고된 일을 모두 맡아 왔습니다. 하지만 큰아들도 자신의 선택에 회의감을 느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의 고통을 통해 얻을 미래의 상이 과연 당연한 것일까 하며. 집을 떠난 그의 동생이 돌아오자 그는 기뻐하기는커녕, 그의 아버지가 작은아들을 성대하게 맞아 들이는 것에 분노하여 가족과의 관계를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큰아들이 “이 것은 불공평하다,”라고 혼자 되새기는 것은 그의 분노, 편협함, 독신적인 태도, 그리고 폭력을 의미합니다.
이리하여 이 “착한” 아들이 가족간의 분열과 자기 자신의 비애를 불러옵니다. “착하지 못한” 아들의 죄와, “너무 착한” 아들의 죄 모두가 가족의 화합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을 맺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못난” 아들이 “착한” 아들로 태도를 돌변할까요, 아니면 그의 옛 태도를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요? “착한” 아들은 동생을 용서하고 받아 드릴까요, 혹은 더욱 깊은 비통과 증오에 빠져 버리는 것일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끝을 맺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 자리한 우리 개개인은 큰아들과 작은아들을 합쳐 놓은 것과 같습니다. 앞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자유와 책임의 균형을 맞추어 나아가는 과제가 우리에겐 주어져 있습니다.
이 두 아들은 균형을 맞추지 못했지만 우리는 이교훈을 통해 현명한 행동해야 할것입니다.

- Those two sons did not do a good job of it – the challenge for us – today – is to do better.    

By Fr. Peter Brannel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