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비유’쯤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는 오늘 복음 말씀은 사실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칩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은 이로 여기고 제 몫으로 돌아올 것을 챙긴 둘째 아들의 행위는 분명 패륜입니다. 그가 겪은 고통과 수모는 정의의 실현이라 함이 옳습니다. 뉘우쳤지만 아버지께 돌아가는 그가 참 뻔뻔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만신창이로 돌아오고 있는 그를 아버지는 멀리까지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요? 복음은 간단히 ‘가엾은 마음’이라 설명합니다. 아버지의 이 ‘가엾은 마음’을 무슨 말로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이를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신 마음이라 설명합니다. 수도 없이 당신께 등을 돌린 이스라엘이지만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버리시는 마음입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가엾게 여기셨으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 아들을 죄로 만드셨을까요? 하느님께서 품으신인간에 대한 사랑은 차라리 극단의 고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허구의것 혹은 비웃음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현상들이 허다 합니다. 복음의 둘째 아들처럼 그렇게 패륜의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음에도 바닥까지 곤두박질 치는 이웃이 너무나많습니다. 물려받을 유산이라고는 ‘빈곤’밖에 없는젊은이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돌아온 탕자라도 가엽게 여겨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겨주고”, 게다가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까지 벌여줄 몇몇 높은 분들은 지상에서 천국을, ‘이대로 영원히’를 노래하지만, 대다수의 이 땅의 평범한 사람들은 “곤궁에 허덕”이고 “돼지 치는 일”자리마저 구걸하고,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럼에도 발전과 성장, 그리고 ‘고진감래’를 들먹이며 고통을 강요하는 이들은 태연하기까지 합니다.
“무수한 사람들이 세계에서 굶주리고 있으므로, 거룩한 공의회는 모든 개인과 정부에 촉구한다. ‘굶주림으로죽어 가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주지 않으면 그대가 죽이는 것이다’고 한 교부들의 말씀을 상기”(사목헌장,69항)합시다.
패륜한 아들의 목을 끌어안는 아버지의 그 마음을, 우리를 위해 당신 아들 그리스도를 죄로 만들면서까지 움켜쥔 하느님의 그 고통스러운 사랑을 값싼 허구의 이야기소재쯤으로 여긴다면, 하느님 앞에 너무 부끄럽고 염치없지 않겠습니까! 교회는 회개와 참회의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 /신수동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