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사회적 지위, 속한 문화권, 거주지역 등 인생의 여러가지 여건들에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진실된 바램입니다. 그렇다면,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물론 개개인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이리 강하게 말씁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오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과 예수님의 이 말씀을 예레미야 17 그리고 시편 1의 맥락과 연관지어 보겠습니다.

가난이란 비참한 것입니다, 가장 흔히 심신의 고난, 경제력의 부재, 그리고 문화적, 사회적으로도 포용받지 못함을 의미합니다. 풍요로움은 가난이란 포괄적 의미의 정 반대를 연상하게 합니다. 부족함이 없으며 모든 여건에서의 안정이 보장되있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선 도리어 가난을 “행복”, 그리고 부유함을 “불행”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선 가난에 따르는 생활의 여건을 풍족한 생활보다 좋게 보셨는데, 그러나 이 말에 따르면 의식주가 고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사람들은 정녕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행복하여 웃고 있는 것 같 사람 또한 정녕 하느님곁으로 갈 수 없다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잠재의식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중 그 어느 누구도 유혹에서 자유로울 순 없습니다. 유혹에 빠지게 된다면 우리는 자신의 이득만 취하고, 보다 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잊고 살아가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오히려 풍요를 누리는 자는 풍요를 잃을까하는 두려움이 앞서 베품에 소홀하고, 도리어 가난한 사람들이 아낌없이 베푸는 모순의 이유이자 예수님의 복음에 반하는 태도입니다. 또한, 우리는 흔히 웃음을 행복하고 풍요로운 이들의 전유물이라 의식되어 왔습니다. 허나 그  웃음또한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 더욱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타인의 비통함과 불행에 대한 무신경으로 이어진다면, 그 웃음은 참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슬픈 일일 것입니다. 비록 웃음이 우리의 신심의 건강에 유익한 것이라고는 해도, 타인의 아픔과 슬픔을 잊고 살아가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일 것입니다.  부유한 도시들이 벽을 세워 빈민가를 숨기듯이, 웃음또한 인간의 현실도피 수단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 중에도, 주님께선 우리의 선택의 자유를 존중해 주십니다. 제1독서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결과는 우리 인생을 좌우하는 선택에 잣대가 됩니다. 예수님께선 진정한 행복과 공허한 삶의 불행함을 대조하여 주십니다.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항상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야망과 성공을 자만심과 욕심을 가지지 않고 수용하는 것은 어렵지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우리를 완벽한 만족으로 이끌어 주는 이정표, 혹은 영원이라는 이름으로 대치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야망과 성공은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에 휩싸여 이유를 불문하고 적게 가지거나 덜 성공한 사람들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그런 자만심이나 이기심으로 사람들과 하느님을 대할 때, 우리의 칭호는 더 이상 ‘행복’이 아닌, ‘불행’이라는 비난이 되는 것 입니다.                                                                        

By Fr. Peter Brannelly / Jubilee 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