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연중 5주일에 교회공동체는 첫째 독서로 이사야의 소명이야기를 읽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천상성전의 모습을 환시하며 사랍들(세라핌)이 세 번“거룩하시다”를 외치는 모습을 봅니다. 이 외침은 후에 요한묵시록 4장에서 “네생물”들에 의해 다시 한 번 반복되며, 미사전례에서도 사제의 감사기도 후 공동체의 응답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 그리고 미사전례에서 천상과 지상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는데, 그것이 3번 반복되는이유는 한편으로는 그 찬양의 아리침을 묘사하면서, 다른한편으로는 그 진정함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이렇게 천상성전을 본 예언자는 큰 두려움에 빠집니다.왜냐하면 과거의 세계관에서 속된 존재가 천상세계를 접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백성 역시 입술이 더럽다고고백합니다. 여기서 더럽다는 것은 부정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입에 올렸음을 뜻합니다. 아마도 아사야의 상황에서 그 가장 대표적인 예는 이방신을 섬
기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죄의식을 우리는 미사전례에서도 발견합니다. 미사의 시작예식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를 참회합니다. 왜 그 부분에 굳이 “말”로 짓는 죄에 대해 참회해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 현대인들에게 의문에 여지가 없는 것을 보면, 이사야가 자신의 부정함을 언급하면서 특별히 입술의 부정함에 대해 말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더욱이 이사야는 앞으로 하느님의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부르심을 받는 사람인 만큼 그 입술의부정함은 그에게 있어서 더 큰 문제일 수도 있겠습니다.예언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랍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이사야의 입에 댑니다. 이 장면은 혹시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이 벌을 받는 장면처럼 보일 수도있으나, 사랍은 이를 통해 이사야의 죄가 사라졌다고 설명합니다. 즉 이것은 죄에 대한 벌이라기보다, 죄로부터의 정화를 의미합니다. 성경의 이 부분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것은 아니지만, 미사전례에서 복음을 듣기 직전 교회공동체는 이마, 입술, 그리고 가슴에 차례로 십자성호를 긋습니다.그를 통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정화되고 예수님의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는 입니다.이렇게 천상성전 앞에서 정화된 예언자는 주님의 소리를듣게 됩니다. 어떤 일인지 설명되지는 않으나 주님을 위해무슨 일인가를 해야 할 누군가가 파견되어야 합니다. 일반적 천상성전의 모습이라면 어떤 천상적 존재가 파견되어야 하겠지만, 그 자리에 있고, 그 임무에 합당한 (즉 정화의 과정을 거친) 예언자가 감히 응답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불가타 성경은 이 부분을 네 단어로 요약합니다: Ecce ego, mitte me. 이 짤막한 네 단어는 교회공동체의 모든 부르심과 파견의 기본적 영성으로 자리 잡게됩니다. 하느님께서 쓰시려고 우리를 정화하셨으니 주님께서 보내시는 곳으로 우리가 떠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당연한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예언자는 연중 5주일을 살아가며 이 네 단어가 우리의 삶의여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며, 깊은 묵상으로 우리 모두를 초대합니다.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