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나, 그리고 어느 분야에서나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흔히 ‘소외계층’이라 부르는 이들이 있습니다.
경제 분야의 소외계층은 이제 언급하는 것도 부질없습니다. 대다수의 사람이 자신의 경제생활을 주도적으로 꾸려갈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경제시스템이 촘촘한 그물망의 씨줄과 날줄처럼 상호의존의 구조임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그물망에 대다수가 갇혀 있을 수밖에 없고, 소수의 특정인이 그들의 이익에 따라 그물을 던졌다 거두어들였다 하는 형국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정치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발적이며 능동적인 ‘참여’입니다. 특히 자신과 사회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나 제도와 법을 만들 때 참여할 수 없다면, 그 사회는 전제주의 사회거나 독재사회에 불과합니다. 정보사회에서 정보의 생산과 유통을 다루는 대중매체가 미치는 영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대중매체는 사람들의 참여를 촉진할 수도, 방해할 수도, 그리고 왜곡할 수도 있습니다.

문화는 “인간의 전인적 완성과 온 인류 사회와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사목헌장 59항)해야 하지만, 현대 사회의 문화는 매매할 수 있는 수많은 상품 가운데 하나쯤으로 간주되고, 그것을 구매할 능력이 없는 수많은 사람은 전인적 완성과 행복은커녕 생존 그 자체를 위해 몸부림쳐야 합니다.누군들 소외계층으로 전락하여, 가난하고 힘없이 그리고 초라하게 살고 싶겠습니까? 또 누군들 그 같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드러내놓고 나서겠습니까? 모두가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과 행복을 추구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소외’의 현상은 남아 있고, 오히려 그 정도와 범위는 심각해지고 있을까요?

오늘 하느님의 말씀에서 그 원인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있습니다. ‘연대’의 결핍이 바로 그 원인입니다. 1독서에
서 시리아의 고관 나아만은 한센 환자였지만, 유다인으로서 하느님의 사람인 엘리사와 연대합니다.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열 명의 한센 환자와 연대합니다. 열명의 한센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가는 장면을 그려봅니다. 그들 사이 인종에 의한 구별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의 동행은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는 한하운의 시 구절 그대로입니다.

2독서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감옥에 갇혀 있지 않”다고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머물지 않았고, 유다 종교의 테두리에 갇혀 있지도 않았고, 이 땅에 사람으
로 오셔서, 곳곳의 가난하고 힘없고 초라한 이들을 당신벗으로 삼아 연대하셨습니다.
“선택된 이들”이라 할 수있는 교회(하느님 백성)는 그분이 하시던 일을 계속(사목헌장, 3항)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입니다.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신수동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