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있는지 없는지를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 기준은 과연 무엇일까요? 고대인들도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것이 확실한 아브라함에 대해서 그가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였다”(창세 13,2)고 창세기의 저자들은 강조한 것은 아닐까요? 또한 기브온에서 제사를 바치다가 잠이 든 솔로몬의 꿈에 나타난 하느님께서는 나라를 통치할 지혜와 함께 부와 명예와 장수를 약속해주셨습니다(1열왕 3장 참조). 그러니까 솔로몬이 누린 부와 명예는 그가 받은 하느님의 축복을 확인시켜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기를 쓰고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또 부자들을 비난할 이유도 없는 것은 아닐까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약간의 잘못을 저질렀다 해서 꼭 공정한 법의 심판을 받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요?
실제로 서로 부자가 되려고 하지 가난해지려고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에게 오늘 아모스 예언자의 말씀은 왠지 우리 마음에 불편함을 줍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 없이
사는 자들!”(아모 6,1). 그들이 불행한 이유는, 자신들은 온갖 사치를 누리면서도 “요셉 집안이 망하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기”(아모 6,6) 때문입니다.
아모스 예언자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의 이야기에서 어떤 기준이 적용되어서 부자(富者)가 심판을 받은
반면에 빈자(貧者) 라자로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재물이 많은 부자이기 때문에 무조건 심판을 받은 것이라면,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좌파’ 혹은 ‘빨갱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듯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이 되는 ‘사유 재산권’을 부인한 ‘폭탄 발언’을 하신 셈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부자가 심판을 받은 것은 재물이 많아서가 아
니라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루카 16,29 참조). “모세와 예언자들”의 가르침이란 다름 아니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19,18; 루카 10,27)라는 가르침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부자가 천국이 아닌 지옥에 가게 된 이유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주위의 이웃에게 따뜻한 관심을 갖고 자신이 갖고 있는 재물과 능력과 시간을 나누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이 기준이 부자에게만 국한된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아브라함이 부자였기 때문에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이듭니다. 그보다는 소돔이 죄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소돔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 아브라함의 따뜻한 행동(창세 18장 참조)을 보고 그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와 반대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이들에게 비난한 적이 있다면, 혹시 이런 우리 행동이 하느님의 축복을 스스
로 거부하는 행동은 아닐지 고민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렇게 한번 묻고 싶습니다. “부자이십니
까?” 만일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행복하십니다. 나눠줄것이 남들보다 더 많기 때문입니다.”
아멘.
신희준 루도비코 신부/사제평생교육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