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첫째 독서는 코헬렛의 서두입니다. 구약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모르는 분들도 한 번쯤은 “하벨 하발림”이라는 코헬렛의 유명한 탄식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우리말로 직역해 본다면 “공허 중의 공허”라는 의미가 될것이며, 우리말 성경은 “허무로다, 허무!”라는 약간 의역된(하지만 매우 적확한) 표현으로 이를 옮기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아벨이라는 이름도 여기에 등장하는 하벨/헤벨이라는 명사와 같은 어근을 갖습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이렇게 인생의 허무함/공허함에 대해 노래하면서 염세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쫓고 노력하고, 또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이루기도 하였으나 결국 깨닫는 것은 인간은 결코 영원한 행복에 스스로 이를 수없다는 헛됨에 대한 체험을 코헬렛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코헬렛만의 깨달음은 아닙니다. 그리스 철학과 그에 바탕을 둔 헬레니즘부터 현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인도의 문명과
함께 태동된 고대 종교로부터 현대 종교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사상계는 같은 깨달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종교인들과 철학자들만의 깨달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나온 채규엽의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로 시작하는 희망가가 그렇고, 80년대에 많이 불렸던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는 노래 역시 인생의 덧없음에 대해 울먹였습니다.
이렇듯 모든 인간 사상이 던지는 의문의 깊은 기저에 는 인간의 행복에 관한 질문이 자리하고 있으나, 우리가 깨달아 온 것이라고는 우리가 이룬 어느 하나도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인간은 결국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허무로다, 허무!”라는 탄식 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세상의 허무함 앞에서 코헬렛은 하느님을 만납니다. 코헬렛의 마지막 부분은 인간의 일은 알 수 없지만, 인간은 자신을 만드신 분을 기억해야 한다
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드신 하느님께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라고 코헬렛은 그 이유를 강조합니다.
오늘의 둘째 독서와 복음도 모두 같은 맥락에서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것을 추구하라고 가르칩니다. 세상의 덧없는 것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는 있겠으나, 그“탐욕은 우상 숭배”이며, 그는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이 콜로새 서간 3장과 루카 복음12장의 공통된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겠습니다. 누군가가 헛된 것을 쫓으며 살았다면 그는 결국 헛된 것을 얻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길을 쫓아 영원한 것을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것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참 좋은 몫을 택했습니다. 다행입니다.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 /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