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서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누구나 길 가는 사람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
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기대하거나 믿습니다. 게다가 ‘초주검이 된 사람’을 보고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리는 사제나 레위인 같은 사람은 더더욱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심성이 그처럼 모질거나 악하지는 않다고 믿고 싶어하며, 설령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말 못할 딱한 사정이 있을 것이라믿고 싶어합니다. 그럼에도 현실에는 강도도 있고, 사제와 레위인도 있으며, 착한 사마리아 사람도 있으며, 그리고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는 사람’이 있음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각에 대해 비난하고, 감동하며, 불쌍히 여깁니다. 적어도 한 개인으로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개인들’ 사이의 사건에서 ‘사회’ 혹은 ‘세계’의 범위로 확장하여 이해할 필요도 있습니다. 우리 자신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어떤 사회나 집단에 태어나 그 안에서 살 수밖에 없고, 그 사회는 개인으로서 나의 의식과 행동을 형성하는 데 막강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회칙 「사회적 관심」과 「백주년」을 통해서 ‘사회의 주체성’과 ‘사회의 소외’란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비록 인간과 동일한 성격은 아니지만, 한 사회 역시 그 자체로 마치 생명을 갖고 있는 유기체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기회만되면 ‘세계화’, ‘지구촌’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강도와 같은, 레위인과 사제와 같은,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죽어가는 사회 혹은 집단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아시아나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빈민촌(비위생적인 거주지역)에는전 세계 인구의 40%가 밀집해 살고 있습니다. ‘이 빈민촌은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는 우리의 이웃 사회가 아닐까?’ 그렇다면 ‘레위인과 사제의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이 빈민촌을 외면하면서 자기들만의 풍요와 품위를 향유하기 위해 반대쪽 길을 가는 이른바 선진 사회는 아닐까?’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빈민촌의 상처를 싸맨 다음 자기의 노새와 돈 써가면서 돌보아주는 착한 사마리아의 사회는 없을까?’ 하는 물음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가장 큰 계명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함께 가르치시면서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하십니다. 우리에게 삶의 길을 가르치십니다. 남(다른 사회)을 죽이지 말며, 혼자(우리 사회만) 살려 하지 말며, 초주검이 되어 쓰러져 있는 이웃(다른 사회)을 돌보는 것, 그것이 삶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처에서 ‘주님’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탐욕을 자유로, 무자비한 침탈을 경쟁으로 교묘하게 포장한 이른바 ‘신자유주의의’의 ‘일류선진국’이란 미망(迷妄)에 사로잡혀 죽음의 길을 밟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내가 속한 사회가 건강하지 않다면, 그 안의 개인이 건강한 선택을 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초주검이 된 이웃(사회)을 일부러 외면할 수도, 아예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모든 인간의 존엄함과 공동선과 사회정의를 위해 선의의 뜻을 가진 이들과 연대할것을 그리스도인에게 호소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 / 신수동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