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맞아 우리는 첫째 독서에서 즈카르야라고 불리는 한 순교자를 만납니다. 그는 하느님을 저버린 요아스 임금을 비난하다가 결국 돌에 맞아 죽고 마는 비운의 예언자입니다. 그에 대한 많은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이 구절을 좀 더 직역해 본다면 “야훼께서 보시고 물을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야훼께서 즈카르야의 죽음을 보시고, 그가 왜 죽게 되었는지에 대해 (그를 죽인 사람들에게) 물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만약 그를 죽인 사람들이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벌을 받을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많은 죽음을 접합니다. 어떤 사람은 병에 걸려 죽고, 어떤 사람은 사고를 당해 죽습니다.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없어 죽고, 어떤 사람은 너무 많이 먹어서 죽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절망 가운데에 죽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신념과 희망을 지키기 위해 죽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순교라는 사건은 한국사와 한국교회사에서 매우 다르게 평가될 수 있는 사건입니다. 당시의 국가적 입장에서만 본다면 그의 행위는 엄연한 범법행위입니다. 하지만 그가 지녔던 종교적 신념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본다면 그의 죽음은 어느 누구의 죽음보다도 숭고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와 같은 신념과 희망을 오늘의 로마서 독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그 희망은 바로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임을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에서 힘주어 강조합니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그 희망이 바로 사제 김대건의 희망이었음을 우리는 조선의 첫사제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옥중에서 남긴 서신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달랐지만 바오로 사도와 안드레아 사제는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고, 따라서 무엇을 위해 죽을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안드레아 사제의 그 희망이 아마도 오늘의 교회의 희망이기에 오늘 우리는 그의 죽음을 순교라는 이름으로 기념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희망을 지키고 간직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울 것인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예수는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이 받을 박해를 예고하십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희망도 역시 남기십니다. 이 말씀은 박해와 구원을 시간적으로 배열하고 있지만, 즈카르야 예언자와 바오로 사도 그리고 안드레아 사제를 기억해 보면 그들은 이미 죽음의 굴레로 부터 해방된 구원을 살고 있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우리도 역시 그 마지막 길을 가야 함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하느님께서 “보시고 물을” 것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고… 아니 안드레아 사제를 기억하며 읽는 오늘의 말씀 안에서 벌써 우리에게 묻고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또 죽어가고 있냐고.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