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앞에 누가 허물이 없고 빚이 없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시편 51,19)한 시인의 고백은 여전히 우리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하느님 앞의 죄는 무엇일까요? 1독서의 말씀에서 보면, 우리야를 칼로 쳐 죽이고, 그 아내를 데려다 자기 아
내로 삼은 것이 다윗이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무시한 죄였습니다. 사람에게 저지른 패악이 주님 앞에 지은 죄였습니다.
복음의 바리사이는 한 여인을 고을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죄인 정도로 소개하고 있는데, 아마 율법에서 벗어난 행위를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채권자(하느님)과 채무자(사람)의 관계(빚의 탕감, 죄의 용서)의 비유로 하느님의 사랑과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사랑)을 가르치십니다.
2독서의 바오로사도는 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과 의로움을 인간들의 율법에 의한 행위 따위로 손에 넣을 수 있다고 가벼이 여기는 그 태도야말로 하느님 앞에 저지른 죄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기에 조용히 있어야지!(죄인인 주제에 쓸데없이 세상사의 시시비비를 따지려 들어서는 안 된다)” 하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처럼 하느님과의 관계를 심각하게 왜곡하는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하느님 앞에 범하는더 큰 죄악일 수 있습니다.
1독서의 다윗의 경우처럼 “주님께 죄를 지었소.” 하자 기꺼이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며, 율법으로 죄인이었던 사람을 의롭게 하시기 위해 당신의 아드님까지 속죄 제물로 내어놓으시는 정의와 은총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이었던 다윗을 당신 백성에 봉사하는 성군으로 만드셨으며, 율법에 따라 그리스도인을 제거하려 했던 바오로사도를 하느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복음의 여인은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에 응답합니다.
소수의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독단이 횡행하는 사회, 다수의 삶이 피폐해지고 있는데도 침묵을 강요
하는 사회, 그 사회에서 짐짓 근엄하게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어 해방을 선포하)는가?”고 말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인을 놓고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죄인이 아닌가?” 그러니“내가 하는 일을 놓고 따지거나 불평불만 갖지 말고 무조건 믿고 따르라”고 윽박지르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만 탈렌트를 탕감 받아놓고 백 데나리온을 빚진동료를 감옥에 가둔 형국입니다(마태 18,23-35 참조).
하느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용서와 사랑과 은총과 의로움을 믿기
에 ‘부서진 영’ ‘부서지고 꺾인 마음’을 주님께 바치며,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진실한 행동으로 주님을 충실히따르”고, 강과 산과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며 (정의와 사랑의)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복음을
전합니다.“교회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합니다”(교회헌장 8항).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신수동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