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만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으로서 따라야 할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따라야 할까요?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데, 마침 동창 신부가 선물해준 책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발견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마음 안에 닻을 내리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뿌리를 내린다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음조차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쁜 모든 일과 마음 아픈 모든 일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나라를 선포할 기회를 제공해줍니다”(헨리 나웬). 지난 몇십 년간 우리 교회는 양적인 측면에서 큰 발전을 이루어왔습니다. 이제 더 이상 TV를 보다가 신자 연예인을 봤거나 신자 정치인을 봤다고 해서 놀라워하지 않을 정도로 되었습니다.
학교나 직장이나 군부대 등에서 나만 홀로 가톨릭 신자였던 과거에 식사하기 전에 성호를 긋는것이 너무나도 쑥스러웠던 기억이 이제는 먼 나라의 이야기만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사회에 신자들의 수가 늘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 사회가 과거보다 더 ‘행복’하고 더 ‘공정’하고 더 ‘아름다워’지지 못하였을까요?
오히려 그보다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넘쳐나는 ‘예수님의 나라’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신자’들은 많아지는데도 어째서 이런 것일까 고민하고 있는 나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갑자기 내면에서부터 크게 들려 왔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그 이유는 사실 간단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지키며’ 사는 ‘참’ 신자들의 수는 크게 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세례를 받아 겉으로는 ‘복음화’가 되었지만 ‘내적 복음화’를 이룬 신자들이 애석하게도 많지 않기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사회 안에서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선포해야 할 대상은 크게 볼 때 둘이 됩니다. 하나는 당연히 세상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향한
우리 전교의 열정이 식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내리신 지상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 ‘내면’입니다. 우리 안에는 여전히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이교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이교인은 우리에게 세속의 가치관대로 살자고 끊임없이 주장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이 사회 안에서 비교적 모나지 않고 손해 보는 일 없이 살 수 있고 또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고 우리를 세뇌시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선택하는 대신에 이 이교인의 가르침대로 살아왔습니다.
이 ‘이교인’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 역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지상 명령입
니다. 물론 이 ‘이교인’이 순순하게 항복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가 지닌 최고의 무기는 우리의 ‘두려움’입니다. 그렇게 할 때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과연 손해 보지 않을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근거 없는 두려움을 우리 안에 뭉게뭉게 지펴 놓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우리 안의 ‘이교인’이 만들어낸 헛된 두려움들을 이겨내야겠습니다. 아멘.
양해룡 사도요한 신부/사목국 선교전례사목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