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재앙이 아니라 평화를 주려 한다”(입당송). 교황 바오로 6세는 “발전은 평화의 새 이름” (민족들의 발전, 76-80항)이라고 선언하면서, 발전을 ‘비인간적인 삶의 여건을 더욱 인간적인 것으로 이행시키는것’으로 정의합니다.
우리의 지식인과 대중매체는 때로는 경제위기에 관해,때로는 경제성장에 관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정보
를 쏟아냅니다. 그런데 경제위기를 말할 때에는 ‘비인간적인 삶의 여건’을 샅샅이 밝히며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불러일으키지만, 성장과 발전을 노래할 때에는 ‘비인간적인 삶의 여건이 더욱 얼마나 인간적인 것으로
이행’ 되었는지를 이야기하지 않으려 합니다. 위기 때에는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재촉하고, 성장을 노래할 때에는 분배를 실현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가르치기 일쑤입니다.

혹시 모든 이가 아니라 일부 특정 계층에게만 유익한 발전을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닌지요?
사실 ‘양극화’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습니다. 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빈곤화 곧 ‘비인간적인 삶의 여건’에 놓여 있거나 놓일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세상은 발전하고 성장했는데, 사람들 사이의 불균형은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심각해집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심각한 불균형과 불평등이 상호불신과 증오, 분쟁과 환난을 일으키며, 인간 자신이 바로 그 원인이 되면서 동시에 희생 제물이 된다고 밝힙니다(사목헌장 8항 참조).
혹시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른 자들”(1독서)이 그들만의 잔치를 위해 “아름다운 돌과 자원 예물로 성전을 꾸미고”(복음) 그 화려함에 넋을 잃도록 세상을 상대로 작업(?)을 건 것은 아닐까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서는 건물들은 위용을 뽐내고 곳곳에 세워진 성전은 화려함을 과시하는데, 그 안의 수많은 사람들은 그만큼 더 초라해지니 말입니다. 게다가 일하고 싶어도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이들에게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라” 거나,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2독서)고 훈계하면서 이미 고되게 일하고 있는 사람에게서 숨 쉴 틈마저 빼앗고, 불균형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닐까요? 전쟁과 반란,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그 수많은 이웃의 불행이 거만한 자들과 악을 저지른 자들이 꾸민 ‘인재’가 아니라, ‘천재’, ‘저개발’ 혹은 ‘운명’ 탓이라고 믿게 만들어 아예 발전(평화)의 의지를 꺾는 것은 아닌지요?

한국 교회는 오늘을 평신도 주일로 기념합니다. 공의회는 “평신도는 저마다 세속에서 주 예수님의 부활과 생
명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표지가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복음에서 행복하다고 선언하신 가난한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 그 생명력을 얻는 바로 그 정신을 세상에 전파하여야 한다. 한 마디로 영혼이 육신 안에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안에서 그 혼이 되어야 한다”(교회헌장38항)고 가르칩니다.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으니,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아멘
박동호 안드레아 신부/신수동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