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은 “부활”이라는 주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1독서는 마카베오기 하권의 내용으로 한 어머니와 일
곱 아들의 순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알렉산더의 죽음 이후 유다지역에 영향을 미친 나라는 프톨레마이스 왕국과 셀레우코스 왕국이었습니다. 한 어머니와 일곱 아들의 순교 이야기는 셀레우코스의 왕이었던 안티오코스가 강한 군사력으로 유다지역을 제압하려고 하자 그에 대항하여 유다의 종교적 순수성을 지키려는 마카베오 가문의 움직임이 시작되는 시기를 그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안티오코스 앞에 끌려나온 어머니와 일곱 아들들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라고 강요당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율법을 어기는 것보다 죽음을 택하겠다고 말하며, 짧은 신앙고백을 남기고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중 넷째가 남기는 마지막 신앙고백을 오늘의 마카베오기는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ANASTASIS)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사실상 “부활(ANASTASIS)”이라는 개념은 구약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마카베오기 하권의 7장과 12장 정도에서 명확한 의미로 사용된 “부활”이라는 용어를 두번에 걸쳐 만날 뿐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신학이 처음부터 부활에 관한 확고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며,
“부활”이란 새로운 시간 즉 “종말”에 대한 기대와 함께 이스라엘이 깨닫게 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신학적 희망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물론 모든 이스라엘이 “부활”이라는 새로운 신학적 희망을 수용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시대를 전후한 유다사상에 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사두가 이라는 유다의 사제그룹은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늘의 루카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이 바로 사두가이에 속하는 몇 사람입니다. 그들의 논리
는 율법을 따르면 어떤 여인이 일곱 형제와 차례로 결혼하는 것이 가능한데, 부활이 있다면 그 여인이 누구의 부인이 될지 애매한 상황이 생길 것이고, 따라서 하느님이 그와 같은 율법을 주신 것은 부활이 없음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로 그들의 논리에 답하십니다. 첫째는 부활한 사람들이 누리게 될 하늘나라에는 결혼하는 일이 없다는 점, 그리고 둘째는 모세가 주님을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고 불렀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두 번째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모세의 시대에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이 모두 죽고 난 후인데도 모세가 하느님을 그렇게 불렀다는 것은 그들이 죽어 사라진 것이 아님을 말한다는 유다적 논리전개가 그 문장에 전제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결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에 등장하는 부활에 대한 신학적 개념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오늘의 말씀에서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는 예수의 선포(Kerygma)입니다.
그것은 단지 세상의 삶에 집착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 안에서 세상과 함께 그리고 이웃과 함께 하느님의 선물인 생명을 풍요롭게 나누고 누리라는 복음의 요청입니다.
최승정 베네딕토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서신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