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5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보좌신부 시절, 당시 주임 신부님과 대화한 적이 있습니다. “신부님! 무엇인가를 바르게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늘 자신과 주변에 깨어 있어야겠지.” “그런데 우문(愚問) 같지만 젊어서 너무 일찍 자신과 세상을 깨달으면 세상사는 게 너무 재미없지 않을까요?” 그때 주임 신부님은 입가에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일찍 깨달을 수만 있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거야.” 지금 생각하면 선문답 같은 대화였습니다. 이해를 다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도 더는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가끔 그 신부님의 말씀이 인생의 묵상 주제처럼 떠오르곤 합니다. 우리 인생은 무엇을 바르게 깨달아야 진정한 삶이 될 수 있을까요?
러시아의 유명한 문호(文豪) 톨스토이는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삶의 본질은 육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그는 부유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한 시골의 초라한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객사하기까지 우여곡절의 치열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인생의 의미란 오직 ‘선에 대한 끝없는 희구’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선은 오직 진리(眞理)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가치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물론 인간의 모든 사회적 죄악에 대한 속죄를 기본 전제로 말입니다. 그래서 임종을 맞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진리를… 나는 영원히 사랑한다.”라고 합니다.
다시 대림절을 맞이한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우리말에 ‘조심하다’는 잘못이나 실수가 없도록 말이나 행동에 마음을 쓰는 것과 마음에 새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깨어 있다’ 도 온전한 정신 상태로 돌아오고 생각이나 지혜 따위가 사리를 가릴 수 있게 되며 잠, 꿈 따위에서 벗어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특히 대림절에 강조하는 ‘깨어 있음’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무작정 미래를 기다리고, 지나간 과거에 연연한 것도 결코 아닐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오히려 현재의 순간에 최선을 다해 머무는 것이 아닐까요? “조심하고 깨어 지키라.”는 주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거룩하고 위대한 기다림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지금 상태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아닐까요? 지금 내가 보는 것, 느끼는 것, 깨닫는 것, 가진 것, 그것이 결코 전부가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야말로 바르게 깨어 있음의 시작이 됩니다. 세상의 것에 너무 기대하지 않고 영원한 삶을 그리워하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혹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깨어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으십시오. 설사 그것이 나 자신이 되더라도 말입니다.

허영엽 마티아 신부 |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