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흔들리지 않고 북극을 가리키는 나침반의 바늘”이 없듯이 흔들리지 않는 삶은 없습니다. 다만 바람을 탓하지 않는 꽃처럼 지구의 자전을 탓하지 않는 나침반의 바늘처럼 아무리 세상이 우리 마음을 흔들어도 끝내 길을 잃지 않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흔들림 없는 믿음이 아니라 그 흔들림조차 딛고 일어선 이 땅의 순교 성인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속에서 예수님은 “죄를 지은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이 과한 듯싶지만 되짚어 보면 미움이라는 것이 일회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처럼 용서 또한 끝없이 되새김질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살다 보면 사랑만큼이나 미움은 마음의 빗장을 닫아걸어도 파고드는 바람과 같이 초대하지 않아도 슬며시 자리 잡는 불청객입니다. 초대한 것도 아닌데 한 번 마음에 들어오면 도통 나갈 줄 모르기에 용서 또한 그렇게 모질게 마음에 되새겨 넣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미움은 초대장 없이 들어오는 불청객이지만 용서는 끊임없이 초대해도 쉬이 자리 잡으려 하지 않는 낯선 손님이라는 점이겠지만 말입니다.
예전에 본당 일에 반대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나쁜 뜻은 아니었겠지만 기분이 좋았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행히 일은 잘 되었고 많은 이들은 그분의 선택에 보이지 않는 질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문안을 가게 되었을 때, 그분은 신부님께 죄송하다고 참 미안했다고 몇 번이나 말을 하려고 했지만 그동안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용서하는 것만큼 용서를 구하는 마음 또한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임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은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구하는 것이 당연하고 용서해 주는 것은 커다란 용기라고 말들 합니다. 하지만 용서를 구하는 것도 용서해 주는 것도 마음을 거슬러 흘러야 하는 것이고 보면 꼭 그렇다고만 말할 수 없습니다. 덕분에 그 이후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미움보다는 쉬이 미움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옹졸함에 대해 더 많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에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잘못하고도 시인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잘못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용서를 구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잘못에 돌을 던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것을 감싸안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세상의 정의가 행한 만큼에 매여 있는 이유이겠지만 하느님의 정의가 참회하는 만큼에 매여 있음을 안다면, 우리가 굳이 세상의 정의를 하느님의 정의보다 앞세워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꽃이 없듯이 흔들리기에 사람이고, 떨리지 않는 나침반은 더 이상 나침반일 수 없는 것처럼 미움과 용서 사이에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삶이지만 끝내 길을 잃지 않았던 순교 성인들의 후예답게 오늘도 일흔일곱 번 흔들려도 일흔일곱 번 딛고 일어서는 우리였으면 합니다.

권철호 다니엘 신부┃삼각지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