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삶이란 살아 있을 때 향기를 간직하고 삶이 다한 자리에 울림으로 자리할 때 가장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봄기운 한가득 아지랑이 피어나는 그 길가에서 삶의 향기를 간직하기 위해 오늘도 숱한 떨림 속에 자리하는 삶이 그래서 아름답습니다. 그 떨림만큼 울림을 간직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언젠가 선배 신부님께서 기도란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 대해 많은 말들을 들었지만 유독 마음속에 와 닿았던 것은 내 집착의 드러남이 유혹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집착하지도 않는 것에 유혹당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유혹이란 내 집착하는 것의 드러남이고 기도는 그래서 나에게 다가올 유혹의 실체를 확인하게 하는 작업이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은 광야를 향해 나아갑니다. 황량한 모래 언덕만이 자리한 그곳은 간혹 보이는 산조차 산이라 말하기 어색한 흙과 돌로 이루어진 언덕 같은 곳이었을 뿐입니다. 우리네 산이 철따라 옷을 갈아입어 사람의 눈길을 끌어당긴다면 이스라엘 광야는 맨몸, 맨살을 속절없이 내보이는 통에 보는 이가 오히려 난처해지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자연의 풍요로움에 마음의 옷을 갈아입는 것이 아니라, 입고 있던 옷조차 벗어 덮어주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광야는 빛의 색감이 그 어디보다 묘한 여운을 남기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시시각각 태양이 비추는 각도에 따라 음영이 드러나는 것이 마치 하느님의 햇살에 의지해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낼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광야를 찾으신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였을 겁니다.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삶, 인간이 자신을 가리고자 입은 온갖 옷들을 벗어 던진 채 오직 하느님의 손길로만 자신을 치장하고자 하는 열정이 살아 숨 쉬는 곳이 광야였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이란 따지고 보면 우리 자신이 입고 있는 위선과 거짓, 탐욕의 실체를 유혹의 그림자를 통해 확인해 보는 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단한 것 같지만 한 끼만 굶어도 속절없이 무너지는 나약함을 마주해야 하는 곳, 채워질 수 없는 탐욕의 창고와 결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 욕망의 깊이를 위해 살아온 세월의 흔적을 마주해야 하는 것이 사순절입니다. 하느님의 따사로운 햇살 한 조각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삶이었는데, 어찌하다 이렇게 덧씌워진 욕망들의 두터운 옷들에 의지하며 살아야 했는지 되돌이켜 보는 시간이 사순절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순절이 은총의 시간일 수 있음은 하느님으로만 지탱되어지고자 하는 우리의 간절함이 자리하기 때문이고, 단지 고통과 고난으로 초대된 시간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천사를 시켜 손수 시중들기 위해 초대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예수님에게 광야가 그러했듯이….
권철호 다니엘 신부/삼각지성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