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 여러분,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지난주에는 마리안 밸리에서 미사를 하셨네요. 평화로운 곳에서 몸과 마음이 재충전되는 좋은 시간이 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부터 당분간 성당 보수공사 관계로 Lvalla Centrer 에서 미사를 봉헌하신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공사 기간 동안 다소 불편함이 있으시더라도 깊이 양해해 주시고 잘 협조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는 아름다운 기도들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기도가 몇 가지 있습니다. 나머지는 나중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바로 조금 전에 여러분들이 미사 시작하자마자 바치신 기도입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사실 인간이 제 아무리 잘 낫다 하더라도 죽음의 순간에 인간이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기도는 이 기도 한 가지 뿐입니다. 이제 곧 하느님의 손에 내 생명을 맡겨야 하는 그 순간에 이 기도 말고 다른 어떤 기도를 바치겠습니까? 우리 삶이 끝나는 가장 절박한 순간에 유일한 희망과 힘이 되어주는 기도가 바로 이 기도이기에 저는 이 기도를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하고 또 참 좋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비유의 한 주인공인 ‘부자’도 죽어서 바로 이 말을 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정말이지 참으로 고통스러웠나봅니다. 비유 내용으로 볼 때 이 부자는 살아생전에 아쉬움이란 모르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어려움과 아픔에도 관심이 없었던 모양압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아픔에 동참한다는 것은 나도 그와 함께 아파하겠다는 이야기이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어떻게든 내가 그들에게 도움이 되어주겠다는 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바로 그의 집 대문 앞에서 도움을 청하는 라자로의 어려움과 아픔에도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하찮은 미물인 개들마저 불쌍한 라자로의 종기를 핥아주며 도와주려는데 부자는 그저 “비스듬히 누워 흥청거린”(제 1 독서) 듯합니다. 그런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 할아버지에게 자비를 구합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누구도 건너갈 수 없는 큰 구렁 때문에 이미 돌이킬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이 삶을 만들어 간다고 합니다. 간절함이 꿈을 이룬다고 합니다. 부자는 살아 생전에 이 절박함이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모세와 예언자들마저 무시하고 살았겠습니까?(29 절) 죽고 난 후에, 즉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래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때가 돼서 가슴을 치며 후회하고 발악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간절한 것은 무엇입니까? 또 우리에게 하느님은 얼마나 절박한 분이십니까? 진정으로 하느님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 하느님의 사람”이며,하느님의 사람은 그 간절함 때문에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합니다(제 2 독서) . 나의 구원을 위해 내 힘으로 무언인가를 할 수 있을 때 겸손하게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며 “하느님의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합시다. 


 하루라도 더 빨리 여러분들과 함께할 수 있기를 기도드리며 멀리서나마 모든 우리 교우들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전해드립니다. 이번 한 주간도 하느님 안에서 활기찬 한 주 보내시기 바랍니다. 


    김종길 제오르지오 신부 / 호주 브리즈번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