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주님을 뵙는 갈릴래아를 찾으십니까?

연중 제23주일 (제1독서) 이사 35,4-7ㄴ (제2독서) 야고 2,1-5 (복음) 마르 7,31-37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09-09 [제3111호, 15면]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 유다 땅에서 출생하셨지만 갈릴래아 지역의 나자렛 마을에서 자랐고 그곳에서 주로 활동하셨습니다. 또한 갈릴래아는 주님의 첫 기적이 일어난 카나가 있는 고장이고 죽은 나자로를 살리신 마지막 기적이 베풀어진 고장이기도 합니다. 더해서 제자들이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를 잡아 올렸던 곳, 제자들에게 부활 후에 만날 곳으로 갈릴래아를 지목하셨다는 것을 기억할 때, 갈릴래아야말로 주님께 참으로 특별한 곳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그곳, 갈릴래아야말로 주님의 은혜가 쏟아지는 자리라 싶습니다. 나아가 우리 믿음의 길에서도 갈릴래아가 존재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곳, 주님을 뵙고 주님과 함께 하는 은혜의 터를 소유하고 지내시는지요?

그날 주님께서는 문제도 많고 그만큼 시름도 깊었던 고장 갈릴래아를 다시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귀가 먹어서 말을 더듬으며 살아야 했던 사람과 마주하십니다. 그런데 그가 스스로 주님께 나올 수 없었을 것이란 사실에 마음이 끌립니다. 그래서 더욱 홀로 할 수 없는 이웃을 주님께로 이끌어 주었고 말을 할 수 없는 그를 대신해서 주님께 청을 드린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남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간구해주는 이웃의 모습에 주님은 무척 행복했을 것이라 어림하게도 됩니다.

그런 만큼 내 우선주의에 빠져서 자신과 가족만 챙기며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이 주님을 무척 아프게 할 것이라 싶습니다. 병든 세상을 외면하는 우리, 앓는 세상을 모른 척하는 우리 모습에 주님의 가슴앓이가 깊을 것이라 싶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팔고 방황하며 울부짖고 있는 세상을 모른 척하는 우리 모습에 주님은 슬픔이 복받쳐 목이 메일 것만 같습니다. 이렇듯 이웃의 문제를 모른 척 외면하는 일은 곧 복음에 눈이 먼 꼴이니 말입니다. 이웃의 사정에 귀를 닫고 지내는 것이야말로 복음에 귀가 멀어버린 행색이니 말입니다. 때문에 허구한 날 성당을 들락거릴 뿐, 정작 주님의 뜻에 반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스스럼없이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내내 하느님의 뜻에 딴청만 부리는 못난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때문일까요? 주님께서는 말씀하고 또 거푸 말씀하십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 4,9) 하물며 성경의 마지막 책 묵시록에서 일곱 교회에 들려주시는 말씀마저 한결같습니다.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묵시 2장 참조) 이렇게 주님께서는 그 무엇보다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계십니다. 물론 듣되 제대로 듣는 일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똑같은 말을 듣고서도 나름대로 해석하고 판단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태도이니 말입니다. 이런 점은 우리 역시 일상에서 자주 겪는 일인 만큼 그 난감한 기분을 잘 이해하실 터입니다. 따라서 오늘도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들으려 하지도 않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내처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심정이 어떠실지 살피게 됩니다.

엘 그레코의 ‘맹인을 고치신 예수’ 일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많은 사명과 의무를 제대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것에 쏠려 있는 우리의 귀부터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때, 우리의 입은 주님의 뜻을 분명하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분별하여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사람만이 복음을 제대로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닌 것에 아니라’고 ‘예할 것에 예’라고 동조하는 올곧은 삶을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오늘 마르코 사가는 그날 주님께서 귀가 먹고 말이 어눌했던 사람을 치유해 주는 모습을 타 복음서와 색다르게 전해 줍니다. 주님께서 그날, 환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라는 구절도 생소하지만 주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까지 내쉬는 장면에서는 생경한 마음까지 듭니다. 그런 주님의 모습이 우아하지도 멋지지도 않아서, ‘우리 주님 맞나?’ 싶고 좀 더 폼나게 기적을 베풀지 않으신 게 약간 아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 오늘 우리에게도 꼭 그렇게 대해주고 싶다는 고백으로 들립니다. 이야말로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귀띔이라 짚어집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하고만 단 둘이……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나를 치유해주고 사랑해주고 싶다는 뜻이라 믿어집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뜻을 묵살하고 있는 우리 모습에 안타까운 한숨만 내쉬신다는 의미로 듣게 됩니다.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영적인 눈이 멀어 헤매는 우리의 어눌한 영성에 주님께서는 탄식하신다는 뜻을 캐게 됩니다. 지금 내 귀와 입을 치유해주시려 “에파타!”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귓등으로 흘릴 때 주님의 한숨이 깊어질 것이라는 뜻으로 헤아리게 됩니다.

그래서 사제는 속이 상합니다. 돈을 가져야 세상에서 이길 수 있다는 판단으로 세상의 것을 자랑하며 지내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도 다수이니 말입니다. 재물이 제일이라는 세상의 지론에 항복한 추한 모습을 수없이 만나게 되니 말입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조차 세상의 악취를 풍겨대는 일이 흔하니 말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자존감을 잃고 당신 자녀의 자긍심을 내던진 채 살아가는 교우도 계시니 말입니다. 더해서 골 아프고 복잡한 일에는 나서기는커녕 물러서서 관망하거나 아무리 심각한 일에서도 ‘남의 일’일 때 철저히 방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말입니다. 이런 이기적인 삶을 곧 지혜로운 삶의 지름길인양 여기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세상지식의 함정임을 모르고 지내니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이 아픈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서 애쓰기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부심으로 세상의 수많은 문제를 세상의 방법이 아닌 하느님의 방법으로 해결하기 원하십니다.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으로 세상을 감동시키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좌절했습니다. 주님께 등을 돌렸고 주님과의 약속을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갈릴래아에서 주님을 다시 만난 후에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희망입니다. 주님의 명령은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기에 우리는 언제나 믿고 또한 희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는 귀를 뚫어주시고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굳어 있는 혀를 풀어주실 것을 믿고 의탁하며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둡고 답답한 갈릴래아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늘도 그 누가 아닌, 바로 나에게 당신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 “에파타”라고 명령하시어 우리의 귀가 밝아지고 굳은 입이 풀리도록 치유해주십니다. 마침내 당신의 말씀을 듣고 전하며 살아내는 복음의 용사로 변화시켜 주려 하십니다. 당신께서 뱉는 한숨과 탄식이 ‘나’ 때문이지 않기를 원하며 조심히 또 조심히 당신의 뜻을 실천하게 되면 정말 좋겠습니다. 하여 하느님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는 세상이 슬픔에 잠겨 있다는 사실을 애통해하며 주님을 위로해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문제가 수두룩하여 매일 탈이 나는 이 세상이 바로 우리의 갈릴래아입니다. 안타깝게 살아가는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는 간절한 마음이 주님을 뵙는 갈릴래아입니다. 언제나 나만의 갈릴래아에서 주님을 뵙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허락되기를 청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선교사목국장)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윤리신학 박사를 취득하고 부산 가톨릭대학 교수로 재임하면서 교무처장 및 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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