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멀리’와 ‘가까이’

연중 제22주일 (제1독서) 신명 4,1-2.6-8 (제2독서) 야고 1,17-18.21ㄴ-22.27 (복음) 마르 7,1-8.14-15.21-23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09-02 [제3110호, 15면]

‘혼자’여서 외로울 때가 있고 ‘함께’여서 고통이 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상처를 덜 받고 덜 주는 상태는 ‘혼자’도 ‘함께’도 아닌, 그냥 ‘가까이’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 ‘가까이에 있기’를 가장 훌륭한 방식으로 이뤄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며, 늘 ‘가까이’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관건입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을 언뜻 보면 ‘율법’과 그에 따른 ‘실천’을 강조하는 내용처럼 보이지만, 그보다 훨씬 본질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현존이 주는 ‘가까움’, 그 친밀함에 대한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사회를 종교적 관점에서 재편성하고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의 진정한 기능은 하느님과 당신 백성 사이의 친밀함, 그 ‘가까움’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1독서는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신명 4,7)라고 선언하고, 복음은 이사야서를 인용하면서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 7,6)고 지적합니다. 하느님과의 가까움, 그 친밀함을 드러내고 유지하는 것이 율법의 본질인데, 형식주의적인 실천만 강조되고 ‘마음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때’ 그 기능과 역할은 무색해지고 맙니다. 하느님과 ‘가까이’ 살아가는 것과 하느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는 것…. 율법의 진정한 기능을 통해 알려주시는 이번 주일 본문들의 주제입니다.


■ 복음의 맥락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며 시작된 마르코 복음(1,1)은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예루살렘에서 종결되는 구조로 전개됩니다. 특별히 후반부(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사건들)를 미리 준비하며 전반부에 종종 등장하는 인물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인데, 예수님 혹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양립되어 소개되는 이 인물들은,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이 율법에 부합하는지 아닌지에만 집중합니다. 오늘 복음의 내용 역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제자들의 행위를 비난하면서 갈등과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 내게서 멀리 떠나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7,1)로 시작된 오늘 본문은 명백히 구별되는 두 그룹의 대조를 통해 누가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는 이들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은 관습과 전통 위에 정초된 율법 조항들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듯합니다. 반대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신분사회 질서와 그 질서를 유지해주는 율법을 매우 소중히 여기며 이에 대한 실천도 철저히 합니다. 그러나 바리사이가 갖고 있던 문제는,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전통과 규칙 준수에 종교의 본질을 두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인간의 자의식만을 권위의 기준으로 삼는 종교는, 더 이상 마음에 그 무엇도 성장하거나 자라지 못하게 하고, 그 어떤 사랑에도 무감각해지게 하며, 이미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를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걱정하며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7-8절) 진정한 종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에 열렬히 동의하며 기쁨으로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종교적 실천의 대상은 ‘율법과 규범’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인 것입니다.

제임스 티소의 ‘예수님에게 질문하는 바리사이’.


예수님의 몇몇 제자들이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음을 불편하게 여긴 바리사이들은 손을 씻을 때 어느 만큼의 물을 사용해야 하는지, 어떤 손가락들을 어떤 방식으로 씻어야 하는지, 팔꿈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그릇들이 깨끗한 것인지… 까지 율법에 따라 실행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바리사이들의 과도한 엄격성과 완고한 실천은 종교의 본질과 크게 관련 없는 것들이었고, 외적인 행위만 옳다면 마음과 생각이야 어찌되었든 상관없이 ‘선한 사람’이 되게 하는 비뚤어진 논리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거룩함은 오직 외적 형식과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용 장신구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사이인들의 율법 실행을 ‘위선적’이라고 간주하십니다. 내적 동기 없이 그저 타성적 의무감으로 법을 준수하는 것은, 결국 대중을 통제하고 무력화하기 위한 강제적이고 가혹한 발명품 이상 이하도 아닌 것으로 율법을 전락시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14절)는 강력한 명령형 문장을 통해 율법과 전통의 본질과 의미를 다시 한 번 숙고하게 하십니다.


■ 부를 때마다 가까이에

오늘 독서의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신명기는 유다 전통사상의 단초가 된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특별히 신명기 신학은 율법 규정과 관습들의 준수를 통한 구원을 강조하는데,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고,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차지할 것이다.”(4,1)라는 문장은 이러한 유다인들의 사고를 잘 드러내줍니다. 하느님의 율법은 이스라엘이 하느님과 관계를 맺기 위한 첫 번째이며 가장 필수적인 요소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종교 자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던 것은 당신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섬세한 배려와 보호를 알려주는 것, 결코 혼자가 아니기에 불행하지 않음을 알려주시기 위한 것이었지 지배와 억압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은 줄곧 이스라엘의 가까이에 계셨고 그들을 따라 다니셨으며 그렇게 함께 오랫동안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율법의 기능인 것입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4,7)라는 반문은 율법 규정의 진정한 기능을 반어적으로 증언해줍니다.


“인간에 대한 모든 규제는 삶에 대한 강렬한 감각을 잃어버리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독일의 실천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입니다. 규칙에 대한 과잉된 준수와 무조건적 실행은 결코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그저 권위적 질서와 체제에 순응하는 무능과 무기력만을 양산시킬 뿐입니다. 인간이 만든 규범을 지키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감수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결국 하느님의 법을 소홀히 하고 인간의 생명을 훼손하는 거대한 형벌 체제와 비인간화만을 결과로 가져왔습니다. 규칙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존엄에 대한 원칙은 없었던 것입니다.

강직한 믿음과 진정성 있는 사랑, 휘둘리지 않는 희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는 법 없이도 충분히 세상을 살게 하는 건강하고도 빛나는 자율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 주변 ‘가까이’에 계시면서 묵묵히 역사와 세월을 함께 겪어주시는 하느님이 찬란한 복음적 원칙으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 김혜윤(베아트릭스) 수녀는
로마교황청립성서대학원(S.S.L.)과 우르바노 대학교(S.T.D.)에서 수학한 후 광주가톨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에서 소임하고 있다.

 * 글:  김혜윤 수녀 /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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