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9. “영명축일을 맞이하며 ...” -어느 신부 묵상글


"신부님, 고스톱 할 줄 아십니까?
여기서는 고스톱을 하지 않으면 본당신부 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이것은 내가 어느 본당에 부임했을 때,
그 곳의 터줏대감 교우들이 던진 첫 번째 말이었다.
본당 사목의 성패가 고스톱에 달려 있다는 이 말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지 처음에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그 본당에서 한 몫 하는 교우들이 고스톱을 좋아하고
또 고스톱을 통해서 인화와 단결을 이루며,
본당의 여러가지 일들이 그 판에서 거론되고 결정되기 때문에
고스톱 모임에 끼지 않으면 일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어느 날,
작고하신 김철규 신부님을 찾아 뵈었을 때
"자네 고스톱 하나?
세상에 훌륭한 지도자가 그런 짓을 했다는 말은 못 들었네."
하시며 훈계해 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교우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말씀이다.

교우들이 본당신부들에게 흔히 하는 말은
'성인신부가 되어라'
'착한 목자가 되어라'
'가난하게 살아라'
'공부를 하라'
'강론을 잘 해달라'
'아동교육, 자선사업,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위해 투신하라' 등이다.
이 밖에도 여러가지 주문이 많다
다 옳고, 다 좋은 말이다.

교우들의 주문대로 다 되어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야말로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어' 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사제도 교우들과 마찬가지로 다 같은 나약한 인간이며
인간적인 한계성과 제약 속에서 살고 있다.
착한 목자로 살고자 하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언제나 거리가 있다.

교우들은 또 모순된 주문도 한다.
이상적인 본당신부를 원하면서 동시에
본당신부를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교우들은 본당 신부를 자기의 취미나 여가 선용의 동반자,
즉 등산, 낚시, 골프, 테니스, 고스톱 등 자기의 놀이의 동반자로
만들려는 경향도 갖고 있다.

비단 이런 놀이 문제만이 아니다.
본당 내의 여러 사도직, 즉 성모군단(레지오 마리애), 구역반 모임,
성모회, 꾸르실료, 성령 기도회, M.E., 등에서 편향적인 사목이나
봉사활동을 하려는 경향도 갖고 있다.

교회 내의 모든 단체 또는 운동들을 다 긍정적으로 보면서
다 균형 있게, 그리고 오늘의 한국 실정과 현실에 맞게 봉사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성서를 읽고 기도하고 토의를 거쳐 분석 비판하면서
보다 더 발전적으로 교회를 이끌어야 하며
[이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하여](1 고린토 9,23) 해야 할 것이다.

교우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사제상과 교우들의 사심(私心) 사이에서
본당신부는 괴롭기만 하다.

우리는 서로 주님의 복음정신대로 살며 봉사할 수 있도록
격려하면서 서로 도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