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묵상] 사랑의 D. N. A 우리 안에 있습니다

연중 제31주일
제1독서(신명 6,2-6) 제2독서(히브 7,23-28) 복음(마르 12,28ㄱㄷ-34)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11-04 [제3118호, 15면]

문득 그날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 질문을 드렸던 율법학자에게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그의 질문 덕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생활방식의 핵심을 배울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했을지…… 평생, 율법의 세부조항에 얽매여 긴장하고 염려하며 노심초사했던 지난날들의 올무가 벗겨져 나가는 해방감을 맛보았을 테니까요. 주님의 답변에 온 마음이 환해져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라는 현답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라 헤아리니, 저 역시 행복해집니다. 솔직히 그의 속내에는 주님을 시험하려는 꼼수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오히려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는 칭찬까지 들으니 신바람이 났을 겁니다. “훌륭하십니다.”라는 진심의 고백이 터져 나왔을 터입니다.

때문에 한결같이 주님을 향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모습에서도 희망을 건집니다. 이런저런 흠집으로 그득한 우리의 일상일지라도 주님께서는 틀림없이 ‘칭찬’해주고 싶어서 살피고 살피신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주님께서 당부하신 것이 오직 사랑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에 감격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 하느님을 사랑할 때, 이외의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해결된다니, 주님의 멍에가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내야 되는 버거운 것이 아니라니, 정말 기쁩니다.

물론 그날 그 자리에는 주님의 말씀에 불만하며 ‘뭔 소리냐’라거나 ‘말이 되냐’며 주님을 비웃는 인물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만들어냈던 수많은 계율이 마음 아픕니다. 그들도 틀림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분만을 섬기며 살아가도록 돕겠다는 선의에서 시작된 일일 테니까요. 사랑이 아닌 ‘판단’을 앞세운 결과의 엄중한 무게가 여실히 다가옵니다.

그들은 수많은 율법조항이 아둔한 백성을 일깨우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모두가 ‘바르게’ 살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다시는 선조들의 치욕적인 역사를 반복하지 않고 이방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서 꼭 필수적 처방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때문에 ‘더 단단한’ 법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 골머리를 썩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든 율법에 사랑은 빠지고 ‘하지 말아야 할 것’에 초점을 맞추어 그분의 사랑을 엄중한 형벌로 변질시켜버렸습니다. 613개의 조항으로 백성을 옥죄이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일상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면 안 된다’는 것으로 수두룩하고 ‘저렇게 하면 그르다’는 지적에 시달려야 했으니, 얼마나 고달팠을까요?

사실 그날 주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모세가 하느님 계명의 속뜻을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물론 “이웃 사랑”에 관한 설명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신명 24,14-25 참조) 그들은 이미 동족뿐 아니라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10,18)라는 명령까지도 충분히 인지하였을 것입니다. 나아가 하느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재판장이라고 선포하신 사실을 환히 꿰고 지냈을 것입니다.(시편 68,6 참조) 지금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주일마다 그분께로부터 ‘하느님의 자녀’라는 말씀을 듣고 하늘나라가 가까이 있음을 확신하는 우리의 모습이 자랑스럽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일상에서 ‘사랑’의 계명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하는 숱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나서서 이웃을 돕는다는 미명아래 오히려 이웃을 힘들게 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의 하느님을 압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에페 1,4-5) 사실을 압니다. 사랑을 철저히 실천할 것을 명하신 그분의 의중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여 세상과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살아갑니다. 때문에 진실로 그분의 뜻을 행할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늘 그분처럼 사랑하며 살아가길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며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늘 지금이 아닌 나중으로 미룹니다.

마치 사랑 실천은 생의 마지막에 하면 되는 것처럼 생각해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일말의 가책은 느끼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말씀대로 살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정말 안 되더라’는 변명에 익숙해져서 하물며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로마 7,19)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마치 자신의 허물을 덮어주는 위로의 말씀인양 여기기까지 하니 말입니다.

깊이 따져보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천국 백성이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백번 마땅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은 전혀 “자랑할 것”이 아닌 의무일 뿐입니다.(로마 3,27 참조)

물론 우리의 이 모자람이 안타까워 주님이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초지일관 사랑만 할 수 있는 능력인은 아무도 없기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스스로 사랑을 살아낼 재간이 없는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티토 2,14)으로 빚고 계십니다. 이렇듯 ‘영구한 사제직’에 충실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복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백성”(로마 10,21)인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온종일 십자가 위에서 팔을 벌리고 계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첫째 사랑과 둘째 사랑으로 구분해서 설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점은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라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따로 놀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려 하신 것이라 느낍니다. 사랑의 조건은 결코 계량될 수 없는 최선이라는 사실을 “다하여”라는 표현으로 일깨워주신 것이라 믿습니다.

사랑만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며 사랑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최고의 원리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복은 실천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제대로 사랑을 이해하고 실천할 때, 바로 그 장소 그 순간에 천국을 누린다는 비결을 만끽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르신 사랑의 계명만 제대로 지키면 다른 계명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부수적인 다른 것들에서 자유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이 소중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웃 사랑은 정말로 쉽게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교회에서 주님을 섬기는 모습이 일상생활과 일치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 예배드리는 그 공손한 모습이 이웃을 대할 때에도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당신의 온 것을 쏟아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온 마음을 다하여” 우리를 한껏 사랑하십니다. 그런 마음이 어떻게 인간에게 가능하냐고 묻지 맙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능력 이상으로”(1코린 10,13) 무언가를 요구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 안에 그 능력이 주어졌다는 엄숙한 진리의 선포입니다. 당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D. N. A가 충분히 주어졌다는 절실한 고백입니다. 우리 안에는 사랑하되 온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D. N. A가 있습니다. 대단치 않은 내 안에는 오직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의 흔적이 존재합니다.

우리도 사랑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느님만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웃 사랑이 없는 하느님 사랑은 가짜입니다.(1요한 4,20 참조)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윤리신학 박사를 취득하고 부산가톨릭대학 교수로 재임하면서 교무처장 및 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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