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연중 제27주일 
1독서(창세 2,18-24) 제2독서(히브 2,9-11) 복음(마르 10,2-16)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10-07 [제3114호, 15면]

세상에서 가장 오래도록 비아냥거림을 들으며 사람들의 입쌀에 시달리는 인물을 떠올려 보면 단연 ‘하와’가 아닐까 싶습니다. 소위 무신론자들마저도 삶이 무겁고 곤고할 때엔 으레 선악과 이야기를 들먹이며 아담과 하와의 죄를 탓하는 것을 쉬이 볼 수 있으니까요.

때문일까요? 흔히 최초의 부부, 아담과 하와가 맨 날 지지고 볶으며 서로 미움과 애증에 얽혀 살았으리라 짐작하는 분이 많으십니다. 아담이 그 사건을 두고두고 곱씹어 기억하며 내도록 하와를 원망했을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아마도 선악과를 먹은 후, 아내 사랑과는 거리가 먼 아담의 못난 모습 탓이라 싶은데요. 그런 만큼 아담과 하와가 서로를 원망하며 갈등했으리라 어림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합니다.

그럼에도 성경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원수처럼 지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 치욕의 사건을 잊었을 리 만무한데 말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허접하고 치사하며 구차했던 기억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인데 말입니다. 그 작은 거짓으로 인해서 낙원에서 추방당한 결과를 낳았으니 그 회한의 깊이가 엄청났을 것이 분명한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서로를 향한 마음이 굳어져서 서로를 용납하지 못했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결코 이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상은 그들로써 마감되는 ‘말세’로 곤두박질쳤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과 하와가 애증의 삶을 살았을 것이란 추측은 우리네의 비좁은 속내일 뿐임이 분명해집니다.

이 사실을 오늘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야말로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결혼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여 살아냈던 ‘지혜’의 소유자라 느낍니다. 아담과 하와는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한다는 진리에 밝았기에 서로의 허물을 탓하며 악다구니를 쓰지 않고 서로를 보듬으며 ‘홀로’ 지내지 않았을 것이라 싶습니다.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기에 좋았던” 주님께서 ‘좋지 않은’ 것을 발견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 봅니다. 콕 집어서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라는 하느님의 고백이 무엇일지 따져보게 됩니다.

웬젤 피터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일부.

오늘 주님께서는 모세가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한 것이 결단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십니다. 결혼에 관한 모세의 율법은 하느님의 뜻에서 한참 모자란다고 딱 잘라 선포하십니다. 이게 웬일일까요? 어떻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접고 인간의 뜻을 따르셨다는 것일까요? 묘한 일입니다.

성경은 완고한 인간들의 횡포에서 약한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혼에 대한 율법이 만들어졌다고 밝히는데요.(신명 24장 참조) 완고함은 딱딱하게 굳어진 마음을 말합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완고한 마음으로부터 당신 백성의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율법이라는 안전장치를 내려주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당신의 숨결로 불어 넣어주신 특별하고 특별한 피조물은 하느님의 뜻을 끝내 몰라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창세 6,5) 슬퍼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창세 8,21)이라시며 너무너무 속상해하셨습니다. 하물며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예레 17,9)라고 한탄하시고 타락한 인류로 인해서 속을 끓이셨습니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인간의 속성이 이토록 하느님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주님의 설명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그날 하느님께서 모세의 청을 들어주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간청하고 애걸했던 모세의 ‘이웃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직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엄청난 하느님의 선언을 마다하고 오히려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느님을 진노케 했던 동족을 위해서 “그들의 죄를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려거든 당신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제발 저를 지워 주십시오.”라며 사생결단을 하고 탄원했던 모세의 동족 사랑이 주님을 감동시킨 결과였음을 감지하게 됩니다.(탈출 32장 참조) 이처럼 누군가를 위한 중재기도야말로 주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일이며 ‘홀로’ 지내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됩니다. 이기적인 생각이 곧 ‘홀로’ 지내는 일이며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일이 곧 ‘홀로’ 살아가는 것임을 새기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완고함 때문에 당신이 지으신 세상이 망가지지 않도록 사랑으로 포용하며 백 번 천 번 물러서십니다. 더해서 완고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키십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님의 목숨을 오직 우리를 위해서 봉헌 받으십니다.

때문에 하느님께 그리스도인은 당신의 온 것을 바쳐 얻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이 큰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홀로’ 지내려는 습성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더불어 살기 위한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 조항은 모두 인간이 하지 말아야 할 것들, 즉 금지사항으로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해서는 안 될 것들을 일러줍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율법을 잘 지킨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고 이르십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최소한의 죄를 면피할 뿐이라고 지적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은 것에 만족하는 율법인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선에 동참해야 하는 존재임을 밝히십니다.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제아무리 똑똑하고 선하게 보이며 도덕적인 인간일지라도 꼭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구세주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우리에게 선물해주신 고귀한 마음을 회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고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만이 추한 삶을 고귀하게 바꾸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모세보다 더 큰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간곡히 기도드리며 우리의 죄와 허물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도록 매달려 애원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주님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진리를 잘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마저도 말씀을 외면하기 일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세조차 누리지 못한 특은을 입은 은총의 복음인임에도 그러합니다. 한마디로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마태 11,11)이라고 높여주신 그리스도인들이 도대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니, 얼마나 통탄할 일인지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를 따지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어떤 것을 실천했느냐’에 주목하십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야고 4,17) 된다는 사실까지 명백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만족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좋은 낙원을 사모했기에 그분과 함께 지낸 기쁨을 잃지 않고 사랑하며 살았던 아담과 하와처럼 ‘홀로’ 지내지 않도록 애써야겠습니다. 세상을 위해서 맹렬하게 기도함으로 예수님 어깨에 얹힌 죄 짐의 무게를 덜어 드릴 수 있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자녀의 자긍심을 지니고 주님의 협력자가 되어 세상의 법을 능가하는 사랑의 삶으로 도약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선교사목국장)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윤리신학 박사를 취득하고 부산 가톨릭대학 교수로 재임하면서 교무처장 및 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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