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오만과 편견

연중 제14주일
(제1독서 : 에제 2,2-5 제2독서 : 2코린 12,7ㄴ-10 복음 : 마르 6,1-6)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07-08 [제3102호, 15면]

프란치스코 콜란테스의 ‘성 에제키엘의 환시’.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 「오만과 편견」(제인 오스틴 著)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입니다. 오만과 편견의 주관성과 그 폭력적 시선 때문에 무너지는 선의와 진실은 언제나 우리 삶 안에서 반복되는 부조리입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에는 주변인들의 오만과 편견 때문에 거부되고 소외당한 예언자들(에제키엘, 바오로,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에제키엘은 이스라엘로부터 거부당했고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에게 미움 받았으며 예수님은 자신을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고향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십니다. 자신보다 탁월한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오만, 그리고 그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는 편견이 하느님의 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 복음의 맥락

예수님의 메시아적 ‘정체성’과 그분에 대한 ‘몰이해’에 집중하여 내용을 전개한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가족들(3,20-35)에 이어 고향 사람들의 몰이해(6,1-6)를 언급합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몰이해는 예수님께서 유다와 이두매아, 티로와 시돈(3,7-12), 호수 건너편 게라사와 데카폴리스 지역(5,1-43)에서 대대적인 성공을 이뤄내신 내용 다음에 등장하는데, 이는 예수님이 멀리 떨어져 있던 사람들로부터는 열광적 지지와 추종을 받았지만, 가까이에서 함께 살아온 이들로부터는 가혹한 저항과 반대를 받으셨음을 알려줍니다.


■ 못마땅함이 일으킨 스캔들

나자렛에는 여전히 예수님의 가족과 친척들이 살고 있었고 고향 사람들은 이들의 평범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한 ‘인물’로 받아들이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복음 본문이 묘사한 사건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놀랄 정도로 훌륭했다는 데에서 발생하는데, 의외의 훌륭함과 성공이 오히려 어떤 이들에게는 불편함과 불평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6,2-3)라는 고향 사람들의 반응은 일단 두 가지를 증명합니다. ① 그분의 가르침이 놀라운 지혜를 전제하고 있었다는 것 ② 그분의 치유 기적이 초월적 힘을 가졌다는 것.

“못마땅하게 여겼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스칸달리죠’로서 ‘넘어지게 하다’, ‘걸려 넘어지다’, ‘분노하다’ 등을 의미하며 여기서 ‘스캔들’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걸려 넘어지게 된 못마땅함의 이유는 예수님이 ‘목수’라는 것,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것, ‘형제와 누이들이 자신들과 함께 사는 이들이라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탄을 자아낼 만큼 훌륭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의 이웃이 된다는 것이 그저 무능하고 시시하며 부질없어야만 함을 의미하지 않을 텐데, 의외의 성공으로 주목을 받게 될 때 기어이 그를 상처 줌으로써 흠집 내고, 얽혀진 운명에서 결코 더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편견은, 사실 우리들 사이에 자주 반복되는 아픔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살펴볼 단어는 ‘놀람’입니다. 가르침이 너무 지혜롭고 훌륭해서 사람들이 ‘놀랐고’(1절), 그런 훌륭함이 이내 본성적 불만과 불신, 폄훼로 이어짐에 예수님이 ‘놀라’십니다.(6절) 결국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발견하시고 다른 기적을 행하지 못하시는데, 인간의 불신과 불평이 하느님의 활동을 제한시키는 원인이 된 셈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향 사람들의 의구심을 단번에 날려버릴 만한 기적을 하심으로써 자신의 초월적 정체성을 드러내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함으로써 그들을 사로잡고 정복하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전적으로 우리와 같은 평범함 속에 자신을 감추어 두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드라마틱한 사명

하느님이 사용하시는 방식의 불편함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거부와 미움을 받았던 또 다른 인물이 제1독서에 등장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하느님으로부터 자립하고자 하는 교만이야말로 하느님 없이 사는 가장 위험한 죄입니다. 그 위험함 때문에 하느님은 예언자를 보내시는데(“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그들은 저희 조상들처럼 오늘날까지 나를 거역해왔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저 자손들에게 내가 너를 보낸다.” 에제 2,3-4), 이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들으려고 하지 않는 당신의 백성에게 먼저 다가가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듣든 또는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어서 듣지 않든… 자기들 가운데에 예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알게 될 것이다.”(2,5)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 틈에 예언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됩니다. 하느님이 환영받지 못하는 곳, 완고함과 거부가 만연한 곳, 그렇게 어리석은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야말로 하느님이 현존하셔야 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이스라엘의 준비되지 않음과 거부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일을 지속해나가십니다.


■ 무가치와 무능이 주는 은총

사도 바오로도 늘 소외와 거부 속에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수님과 함께 공생활을 했던 12사도단에 속하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하는 사도직의 정통성이나 자격을 늘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던 조건이었습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는 코린토인들의 반대를 받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하느님이 주시는 고통까지 감수해야 했습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2코린 12,7) “가시”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를 매우 괴롭혔던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세 번이나 치유를 간청했지만 하느님은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12,9)며 거절하셨다고 진술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다인들의 전통적 사고에 의하면 질병은 죄의 결과였습니다. 그런데 바오로는 이러한 통념을 넘어서서, 이 질병이 자신에게는 은총이었음을 역설합니다. 바오로에 의하면 인간의 약함과 질병은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동성을 증가시키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바오로는 자신의 약점과 나약함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12,9-10)

삶의 여유와 성숙은, 평생 입에 대지 않을 것 같은 음식을 기꺼이 먹어주기도 하고, 평생 상종하지 않을 부류의 사람을 마음을 다해 만나주기도 하면서 축적되는 은총입니다. 어쩌면 ‘불편함에 익숙해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양이고 품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불편함에 적응하지 못할 때 생기는 분노의 또 다른 이름이 오만과 편견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의 오만과 편견이 평범함과 보잘것없음 때문에 발생한 불편함이라면 더 조심하고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이들이야말로 맘 놓고 비난해도 되는 ‘을’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은총의 도구이며 나의 예언자가 되는 ‘갑’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김혜윤(베아트릭스) 수녀는
로마교황청립성서대학원(S.S.L.)과 우르바노 대학교(S.T.D.)에서 수학한 후 광주가톨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에서 소임하고 있다.

김혜윤 수녀(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 Peace be with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