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오해와 의심, 악의 시작’

연중 제10주일
(제1독서:창세 3,9-15 /제2독서:2코린 4,13-5,1 /복음:마르 3,20-35)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06-10 [제3098호, 15면]

‘마음에 걸리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오해하고 미워해서 멀어져 지내게 될 때 드는 생각입니다. 보여주는데도 보지 못하고 알려 주는데 알지 못하며, 마음을 전달하는데도 거절할 때, 결국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을 함부로 단정 지으며 상대를 비난하게 되는데, 이러한 비극은 대부분 나 자신만 챙기고 내 생각만 할 때 발생합니다. 자기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고 우월하다고 간주할 때 배타성과 폭력이 등장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성서적 관점에서 본다면, 악은 하느님의 일을 하느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오해하는 데서부터 발생합니다. 오늘 본문들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니 어쩌면 이해할 마음이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비난, 반대, 방해가 악이며, 모든 죄는 다 용서받을 수 있어도 하느님의 일과 그분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일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음을 경고합니다.


■ 복음의 맥락

마르코 복음은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예수님의 ‘말씀’보다 ‘행위’에 더 주목하여 전개되는데, 이러한 예수님의 행보는 주로 갈릴래아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이루어집니다. 갈릴래아에서의 생활은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통해 두 부분으로 나뉘며, 첫 부분은 시몬-안드레아-야고보-요한을 부르시는 장면(1,16-20)을 시작으로 진행되고, 두 번째 부분은 12사도를 뽑으시는 장면(3,13-19)으로 시작됩니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인 3,20-35는 예수님의 활동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는데, 마르코에 의하면, 예수님이 12사도를 뽑으신 후 당신 주변에 머물면서 함께 일할 동지들을 선발하시는 것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에 대한 오해, 용서받지 못할 죄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 증가하면서 동시에 그분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이들의 수도 증가합니다. 몰이해로 인한 오해와 비난의 이야기는 ‘그분이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가?’라는 마르코 복음의 대주제와 병행되며 전개되며, 특별히 오늘 본문은 이러한 몰이해와 비난이 친척과 가족들로부터도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친척들은 “소문을 듣고”(21절) 그분을 잡으러 나서는데, 그리스어 원문은 “그분에 대하여 듣고”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친척들은 타인의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선 것이 아니라, 그분에 대하여 들은 것만 가지고 그가 “미쳤다”고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미쳤다”는 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엑시스테미’로서, 이 단어가 ‘구마’(엑소시스트)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을 가짐을 염두에 둔다면, 단순히 ‘정신이 나간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고 ‘마귀 들렸다’로 번역해도 무방할 듯 합니다. 

엘 그레코의 ‘소경을 치유하는 예수’.


이러한 친척들의 오해와 비난은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학자들에 의해 동일하게 판결됨으로써(22절 참조) 더 비중을 갖게 되는데,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이 실제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예수님의 치유 행위에 대하여서는 그 어떤 부인도 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에 의해 발생했던 모든 치유 사건은 그야말로 팩트(fact)이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단지 그들이 주관적으로 판단하고 몰아갈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은 치유의 기원에 대한 것이었기에 예수님에 의해 행해진 모든 치유의 기원이 악에 있다고 규정함으로써 그 신적 속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비난에 예수님은 전혀 어렵지 않게 반박하십니다. 그들의 질문 자체에 모순이 있었기 때문인데, 요지는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박을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나? 한 나라도, 한 집안도, 서로 갈라서면 버티지 못하는데, 하물며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리 있겠는가?”(23-26절 참조)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모독하고 고발하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일임을 분명히 경고하십니다.(28-29절) 하느님의 일을 두고 악의 일로 오해하고 폄하하는 것,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행위가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부인하고 악(더러운 영)의 일로 간주하며 그분을 의심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하느님을 의심하게 하는 오해

이렇게 하느님을 의심하는 것이 모든 죄와 악의 시작이었음을 알려주는 본문이 제1독서입니다. 인류의 첫 번째 죄가 시작되는 내용에서 뱀은, 마치 하느님을, 인간이 당신처럼 될까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못하게 한 분으로 오해하게 유인함으로써, 그분을 제한적이고 통제적이며 인색한 분으로 왜곡합니다.(창세 3,5 참조) 그리하여 창세기의 저자는 하느님을 의심하고 그분께 대적하게 하는 것이 악의 시작이라고 알려줍니다. 또한 아담은 자기 잘못에 대해 여자가 준 과일을 받아먹었을 뿐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당신께서 저에게 주신”이라는 표현을 통해(12절) 하느님을 모든 비극의 기원인 것처럼 암묵적으로 고발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오해와 무지가 다시 발생하고 있는 순간인 것입니다.


■ “밖에 서서”와 “그분 주위에”

복음으로 돌아와서, 예수님과 율법학자들이 극도의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중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등장합니다.(30절) 본문의 서두에서, 친척들이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제 정말 예수님의 가족이 그분을 찾아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복음은 매우 섬세한 ‘공간적 대조’를 통해 ‘하느님의 사람’과 ‘그분을 오해하는 이들’을 구별합니다. 예수님을 방해하는 이들이 “밖에 서서” 있는 것에 비해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은 “당신 주위에” 있습니다.(31절) “그분 둘레에” 앉아있는 군중과 “밖에서” 있던 이들이(32절) 대조되고 있는 것인데,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4-35절)라는 말씀은, 결국 당신 주변에 있으면서, 당신을 따르고 당신의 말씀을 경청하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가족이라는 새로운 선언이 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턱대고 좋아하는 것도 문제지만, 잘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싫어하고 비난하는 것은 더 큰 문제가 됩니다. 혹시 사람들끼리는, 그건 오해였다고 미안하게 되었다고, 이후에라도 진심으로 얘기하면 용서받을 수 있겠지만, 하느님을 오해하는 것은 생명의 주인과의 단절을 자처하는 것이기에 스스로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제1독서에 등장하는 ‘아담’은 ‘아다마’(흙, 먼지)에서 파생된 말이고 이는 당연히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를 드러냅니다. 단편적이고 불완전하며 일관적이지 못하고 편파적인 존재가 인간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서 흠숭하며 경외하는 것이 모든 영성생활의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일과 그분의 영역, 그리고 인간의 일과 인간의 자리를 정확히 구분하고 이 질서에 맞추어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자주 넘어지고 무너질 수 있는 존재인지를 인정하는 것, 그럼으로써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자리를 우리 각 개인과 교회 공동체 안에 명시적으로 겸손하고 신중하게 인정하는 것,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는 하느님의 질문에 도망가거나 숨지 않고 우리 자신의 길을 온전히 살아내게 하는 영성의 단초입니다.

※ 김혜윤(베아트릭스) 수녀는
로마교황청립성서대학원(S.S.L.)과 우르바노 대학교(S.T.D.)에서 수학한 후 광주가톨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에서 소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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