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떼어진 빵,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
우리는 ‘신비적 몸’ 안에서 하나 돼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06-03 [제3097호, 15면]

오늘의 묵상 말씀은 미사 때마다 우리의 심장을 강하게 건드리는 부분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주 접하지만 언제나 가슴이 먹먹해지고 두근거리게 됩니다. 그 거룩함은 나를 깊게 침잠시키고 온전히 받아들이고자 하는 나의 열망으로 온몸이 긴장합니다. 어느 한 절도 그냥 지나칠 수 없지만 오늘은 그리스도 수난의 의미와 제자들 간의 신비적 결합을 보여주는 22절 중심으로 묵상할까 합니다. 예수께서 중요한 순간에 행하신 일들로 이루어진 이 구절은 당신의 전 생애를 함축한 것이요, 성경의 전부를 요약한 것이며, 사랑받는 아들로서 자신의 전부를 아버지와 우리에게 기꺼이 내어주신 사건입니다. 이 엄청난 사건은 우리 존재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내어주는 몸의 혼인성에 우리 각자를 초대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내 존재의 이유와 내가 바라봐야 할 정점을 갈망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22절)

“빵을 들고…”, ‘들다’는 자신의 의지가 들어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 놓을 사건에 동의한다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의문이 하나 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만찬 후 당신에게 몹쓸 일이 일어날 줄 알면서도 심란함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빵을, 또 잔을 들 수 있었을까요?

이 행위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이 어디로 정향 되어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하느님과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지요. “아무도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그것을 내놓는 것이다.”(요한 10,18) 그러므로 예수께서 드신 것은 단순히 빵이 아니라 당신의 전 생애에 우리를 담았던 것입니다. 고통과 실패들, 좌절과 기쁨들, 인간의 모든 것들을 받아들여, 그 전부를 들어 올린 그곳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이 사랑을 알고 받아들이기를 원한다면, 내어주신 당신 몸 안에서 우리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새로운 준비를 하는 사랑의 첫 번째 몸짓은 곧 나를 들어올리는 행위인 것이지요.

“찬미를 드리신 다음…”, “축복하다” “감사하다”의 뜻을 가진 이 단어가 마르코복음에서는 ‘찬미’라고 번역되었네요. ‘축복하다’는 히브리어권 안에서 하느님께 감사를 드러내는 방법이며, 그리스어로는 ‘감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탈출 한 후, 광야에서 고통과 어려움을 만날 때면 주저 없이 걱정과 비탄을 쏟아내었고, 실제 그들은 하느님께 직접 대들기도 했습니다.(탈출 16,2-3; 17,2-3; 민수 11,4-5)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현재 이 상황에서도 찬찬히 찬미 드리며 덤덤히 받아들이고 계십니다. 빵과 포도주는 식사 때마다 가장 기본적인 음식이요 매일 수고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드러냅니다. 이 둘의 공통적인 부분은 형태 변화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밀은 분쇄되어 가루가 되는 변화를 겪어야 하고, 포도는 으깨어져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변화된 빵과 포도주는 먹는 이에게 기쁨과 힘을, 나누는 이들 간에는 유대감을 줍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앞선 감사요, 쪼개는 빵과 함께 나눌 포도주를 통해 현재를 감사하는 힘이 찬미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는 오직 아들과 아버지 간에 나누는 사랑의 내적 일치에서만 가능합니다. ‘축복’과 ‘감사’가 새롭고 영원한 계약으로 변화됩니다. 이 변화는 우리에게 질책이 아니라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그것을 떼어…”, 이제 ‘빵의 조각’이 됩니다. 한 조각으로 나에게 오심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 어느 조각도 버려짐 없이 모아지기를 그분께서 원하신 것입니다. 떼어진 그 빵이 이제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 되고 우리는 그 근원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되고 그의 ‘신비적 몸’ 안에서 하나 됩니다. 우리가 완성시켜야 할 몫을 남겨 주신 것이지요.

“주시며 말씀하셨다…”, ‘주다’, ‘넘겨주다’. 다른 사람들 손에 ‘자신을 놓다’는 의미입니다. 하나의 사명과 함께 하나의 빵, 하나의 몸이 쪼개어졌고 그리고 넘겨졌습니다. 믿고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유다에게도 빌라도에게도 최고 사제들에게도 지금 우리들에게도 당신 자신을 넘기신 것입니다. 단순하게 준 것이 아니라 인계된 몸입니다. 맡기신 것입니다. 누군가 그것을 수용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다의 손에도 군인들의 손에도 자신을 인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보다 먼저 아버지께 인계했습니다. 아버지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 대한 자비를 아버지께 청하며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쪼개어진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이콘.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받아라”로 번역된 ‘라베테(Λάβετε)’는 ‘손으로 잡다’라는 뜻으로 ‘너희들 각자가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빵이 아니라 몸이 되셨습니다. 몸은 생명을 넘어 몇 가지 의미를 더합니다.

몸은 선물입니다. 받은 것입니다. 나의 존재 자체가 형이상학적 특징을 갖는 이유입니다. 이 몸은 자기 자신을 선물로 내어주는 사랑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되찾게 됩니다.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힘을 통하여 ‘줄 수’ 있는 힘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갇힌다면 자신을 발견할 수도 되찾을 수도 없습니다.

몸은 혼인적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자신을 내어주고 너를 받아들여 한 몸이 됩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에 계시된 하느님은 인간을 부르고 혼인적 사랑을 나누고자 하셨습니다.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받고 내어줌이 상호 교환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몸은 ‘사랑의 언어’를 갖고 대화합니다. 이 언어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인격 표현의 수단이 됩니다. 선물, 혼인적 속성, 사랑의 언어, 이 셋은 서로 분리되지 않고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매일 그분의 몸은 자신을 내어주는 선물로 우리에게, 신부와 일치하는 신랑의 혼인적 속성으로, 한몸을 이루는 사랑의 언어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받아들이는 그 자체가 곧 내어줌(상호교환)이 되어 이제 자신의 몸이 성사요 거룩함의 주체임을 깨닫게 되고, 그 충만한 완성, 놀라운 기쁨, 완전한 행복을 맛보고 갈망하게 됩니다.

희생의 피가 승리의 잔에 담겨있음을 보십시오. 이제, 승리의 잔을 들고 우리가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을 향해 걸어가야겠습니다. “당신께서는 제물과 예물을 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에게 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히브 10,5)



※ 김혜숙 선교사는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신학과 교황청립 안토니오대학 영성학과를 졸업하고,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이며, 대전가톨릭대 혼인과 가정대학 신학원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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