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 부활 제6주일

제1독서(사도 10,25-26.34-35.44-48) 제2독서(1요한 4,7-10) 복음(요한 15,9-17)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05-06 [제3093호, 18면]

오늘 복음을 좀 더 깊이 만나려면 같은 맥락으로 말씀하신 앞부분으로 거슬러 가야겠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사별단계에서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3.34)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은 이미 구약시대부터 존재했습니다.(신명 6,5; 레위 19,18)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데 왜 “새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새καινός(kainos)”는 그리스어에서 중요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의미가 밝혀지고 있습니다. 절대적 새로움, 바로 “~것처럼”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9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12절)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함께 가까이 가 볼까요?

“것처럼…”,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의 무게를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어디에서 솟아나는지 그 근원을 말합니다. 내가 행하는 사랑이 나의 외적 행위에 의해 단순히 측량됨이 아니라 어느 근원에서 솟아나는 것인지를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9절)이라 먼저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사랑은 어떤 열매가 아니라 한 인격을 만나는 것으로 인해 분출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을 통해 일어나는 사랑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율법으로 주어졌고, 그 율법의 기준에 의해 외적 행위로 시작되는 사랑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머물고 있는 사랑(카리타스)이 원인이 되어 나의 자유와 의지로 재창조하는 것이기에 ‘완전히 새로움’입니다. 사랑은 나의 내면에 나를 사랑하는 그분의 현존이 먼저이고 그분의 사랑이 나를 매료시키고 초대하는 큰 사건이지요. 내 사랑의 원천이 바로 여기이며 이곳에서 분출됩니다. 그래서 지치지 않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이름이요 인격이라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했습니다. 옛 것을 거스르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는 완전 새로움입니다.(1요한 2,7-8)

이 관계가 성립되려면, 나의 문을 열어 그 사랑에 머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반복되게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고 들려줍니다. 나를 사랑하는 이와 함께 머무는 행복입니다. 우리도 함께 머물러 봅시다.


지오토 디 본도네의 ‘ 발을 씻기심’ .

“머물러라, 머무르는 것처럼, 머무를 것이다”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머물다μένω(menō)’는 특별한 관계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처럼 머물 수 있는 관계는 바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인격 즉, 그분의 사랑에 머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나누는 사랑의 관계는 완벽한 이가 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함께 걷는 이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론 자신의 욕망이나 세상에서 부는 바람 때문에 많이 흔들릴 때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이럴 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사랑을 지니신 그분의 위대한 의지 앞에 나의 의지와 자유를 성장시키는 시간이 흔들림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에서 친구로 발전하는 희망의 신호입니다.

13-15절에서 “친구”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친구는 ‘영혼의 보호자’라는 말에서 유래합니다. 이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는 표지입니다.(집회 6,14.16) 사랑의 계명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보호하고 지키는 이가 친구를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제자들은 토라를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당시 문화는 제자가 스승을 선택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반대로 당신 스스로 제자를 선택하시고 더 나아가 친구라 부르십니다.

당신 친히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우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 곧 자신의 마음 속 비밀을 보여줄 수 있는 사이이자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영혼 속에 함께 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친구는 그 친구의 지혜에 참여함으로써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지혜 7,27)가 이루어집니다. 벗과 예언자로서 그분의 명령을 받게 됩니다. 이 친구는 이제 큰 명령을 받게 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라.”(17절) 불란서 어느 대학 논술시험에서 사랑이 명령형이 될 수 있는지 논하라는 적이 있다고 합니다. 과연 개인의 자유가 없는 사랑이 성립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명령형으로 말씀하셨을까요?

토마스 아퀴나스는 새로운 계명은 ‘성령의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곧 성령 자체로부터 선사된 나의 새로운 내면을 말합니다. ‘이미 내가 너희에게 주었으니, 이제 너희도 서로 주어라.’ 아니면 ‘내가 너에게 왔으니 나를 주어라’ 하면 더 이해하기가 좋을까요? 받은 것을 내어줄 때 기쁨은 차고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11절) ‘사랑하라’가 명령형이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의 방식은 상호 교환과 사랑하는 이의 선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두 인격 간에 교환되는 이 사랑은 정의로우며 최종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지속됩니다. 예수님과 성부의 관계에서 우리는 많이 만날 수 있습니다. 아들이 늘 아버지를 바라보았던 것은 그 사랑의 원천이 바로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삼위일체 사랑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누는 사랑을 보는 것은 주님을 보는 것과 같다 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를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육화의 삶을 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연유는 그리스도가 이미 우리에게 육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 밖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라 하셨습니다.

왜 이토록 사랑을 주려고 하셨을까? 부모는 자식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물려주려고 애씁니다. 어떤 이는 돈을, 어떤 이는 권력을, 어떤 이는 진리를, 어떤 이는 사랑을…. 하느님은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신 자체였습니다.

파스칼은 하느님을 ‘철학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 말했습니다. 이는 하느님은 인간 마음의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곧 나의 가장 깊은 내심에 현존하는 분, 그럼으로 인해 그분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분을 이룬 것입니다. 신화입니다.


※ 김혜숙 선교사는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신학과 교황청립 안토니오대학 영성학과를 졸업하고,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이며, 대전가톨릭대 혼인과 가정대학 신학원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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