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유혹, 사랑하기 때문에 감내하는 것 / 사순 제1주일

2월 18일 사순 제1주일(제1독서 : 창세 9,8-15 제2독서 : 1베드 3,18-22 복음 : 마르 1,12-15)

"광야는사랑을 만나고 빛을 품게 하는 은총의 장소"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02-11 [제3082호, 17면]

유다 광야.출처 위키미디어

굳이 ‘광야’ 혹은 ‘사막’이 궁금하다든지, 한번 가보고 싶다든지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생텍쥐페리라는 유명한 작가가, 사막은 죽음과 불모의 장소가 아니라 무한한 영감과 생명의 본질을 품고 있는 곳이라고, 시종일관 찬양하며 쓴 작품들을 읽게 되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어도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공부하면서 이스라엘에게 광야는 거의 일상의 또 다른 이름임을, 생존에 지치고 질식되어가는 인간들에게 다시 생명을 살게 하는 원천 같은 곳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사건들로 인한 공포에서, 견디고 버티다가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려워 마주한 절망에서 우리를 다시 살 수 있게 하는 곳은, 역설적이게도 도움을 줄 사람이 전혀 없는 곳,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도 없어서 하느님의 존재만으로 충만한 곳, 광야입니다. 사순 제1주일의 복음은 ‘광야’에서 40일을 지내시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 본문의 맥락

다른 공관복음서들보다 먼저 제작되고 상대적으로 짧은 분량으로 되어 있는 마르코 복음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 중 ‘행적’에 보다 비중을 두어 전개되는데, 지리적 배경에 따라 전반부는 ‘갈릴래아’(1,9-8,30)에서, 후반부는 ‘예루살렘’(11,1-15,47)에서 진행됩니다. 오늘 복음의 본문은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마르 1,14 참조), 광야라는 독립된 장소로 가시고 거기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 광야, 역설적 조화의 공간

마르코 본문은 특별하게도 이 광야로의 여정이 “성령”에 의해 주도된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조금 앞서 등장한 예수님의 세례 장면에서 더할 나위 없이 신비로운 모습(‘하늘이 갈라지며 내려오는’, 마르 1,10)으로 등장했던 바로 그 성령이 이제는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고 합니다.(마르 1,12) 이때 사용된 그리스어는 ‘엑크발로’인데 ‘강압적으로, 쫓아내듯이 내보내는’ 행위를 말합니다. 도대체 왜 성령은 예수님을 광야로 내몰듯이 보내신 것일까요? 거룩하고 초월적 존재인 성령과 예수님, 그리고 황폐함과 두려움이 가득한 광야는 도대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걸까요?

‘광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미드바르’이고 그리스어는 ‘에레모스’입니다. 두 단어를 통합해서 보면 광야가 갖는 이중적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말씀’과 관련된 곳(히브리어 ‘미드바르’에는 ‘다바르’[말씀]에 해당되는 어원 내포)이자 ‘고립’, ‘버려짐’, ‘황폐’(에레모스의 의미)의 장소입니다. 곧 광야는 버려져 황폐해진 곳이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을 그 어디보다 또렷이 들을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이중적 이미지는 오늘의 짧은 본문 안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성령”에 의해 내보내져 가신 광야에서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받으시고,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시며” 동시에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십니다. 전혀 공존할 수 없는 극단의 존재들(성령-사탄/들짐승들-천사들)이 병존하고, 심지어 무리 없이 각자의 일을 하는듯한 느낌마저 줍니다. 어쩌면 서로 충돌하고 긴장을 유발시키며 불편함을 조장하는 요인들이, 상대를 없애버리거나 소외시키지 않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각자의 꼴을 유지하는 곳, 천사가 사탄을 제거하려 하지 않고 아무리 사나운 존재들이라 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곳, 그렇게 불합리하고 불가능한 일이 오히려 묘한 긴장감 속에 조화를 이루는 곳이 광야입니다. 죄와 어둠은 어쩌면 거룩함과 빛을 갈망하게 하는 가장 힘찬 동인(動因)일 수 있으며, 이렇게 하느님의 공간에서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온전히 존재합니다.

■ 재난, 그리고 무지개

이러한 역설은 제1독서에서도 그대로 반복됩니다. 사실 창세기의 홍수 설화는 구약성경의 앞부분(창세기의 전반부)에 배치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비교적 후대(유배 혹은 유배 이후)에 제작된 본문입니다. 매우 진화된 신학이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맺었던 계약은 ‘선민(選民)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계약의 범주가 무한대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단순히 이스라엘과만, 그들의 하느님으로서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미래의 모든 세대… 모든 생물”(심지어 부정적 이미지인 “들짐승”과도, 창세 9,9-12)과 계약을 맺으시는 분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그 계약을 기억하고…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창세 9,15)는 보호 의지까지 공고히 하는 것이기에, 이 계약은 세상의 그 모든 존재를(죄와 악의 요소까지도) 보호하시고 받아들이시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독서의 본문은 이러한 하느님의 계약이 “무지개를 구름사이에” 두어 표상되었음을 언급합니다.(창세 9,13) 무지개 자체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 요소들의 병존을 품고 있습니다. 주로 무서운 폭풍우나 급작스러운 호우 다음에 등장함으로써 힘겨운 과정과 그 고난이 지나간 자리에 들어서는 희망과 극복을 연계하여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 유혹, 하느님에 대한 의심

광야에서 예수님은 들짐승과 천사를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복음), 창조주 하느님은 위협적인 들짐승과 사나운 짐승들도 보호하며 살아남게 하시겠다고 계약을 맺으십니다.(제1독서) 그렇다면 하느님은 악을 방관하고 허락하며 보호하는 분이신 걸까요? ‘유혹’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면 이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 본문의 “유혹을 받다”에 해당되는 그리스어는 ‘페이라조’로서 ‘시험하다’, ‘유인하다’, ‘꾀다’라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은 악을 없애지 않으시지만 악의 유혹을 극복하십니다. 성경에서 유혹은 단순히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관점에서 이해될 내용이 아니라, ‘의심’ 혹은 ‘의혹’과 연결된 단어입니다. 창세 3,5는, 최초의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지를 의심하게 하는 것이 유혹의 시작이었음을 알려줍니다. 뱀이 하느님의 말씀을 뒤집어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라며 그 뜻을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의심하게 하는 것, 이것이 유혹의 본질인 것입니다.

신약성경도 악마의 유혹은 대부분 하느님을 의심하게 하는 일임을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의 병행구절인 마태 4,1-11에서 악마는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 4,1-11)이라는 표현을 반복하면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몰아가고, 십자가 아래에서도 “(만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 27,40-44)라는 표현을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듯한 현실을 강조함으로써 사랑을 위험하게 합니다.

유혹을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유혹을 극복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분명히 믿고 흔들리지 않는 희망으로 성숙해짐을 의미합니다. 유혹은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감내하는 시련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오직 사랑만이 죄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성령은 때때로 우리를 광야로 내몰고, 거기서 홀로 악마의 유혹을 받게 하지만, 오히려 그 유혹을 물리치게 하는 진짜 사랑의 얼굴을 보게 함으로써 삶에 다시 생명을 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광야는 사랑을 만나고 빛을 품게 하는 은총의 장소인 것입니다. 


※ 김혜윤(베아트릭스) 수녀는
로마교황청립성서대학원(S.S.L.)과 우르바노 대학교(S.T.D.)에서 수학한 후 광주가톨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에서 소임하고 있다.

김혜윤 수녀(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 Peace be with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