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예수님을 키워주신 두 분, 정말 고맙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
제1독서 (집회 3,2-6. 12-14) 제2독서 (콜로 3,12-21) 복음 (루카 2,41-52)

가톨릭신문 발행일2019-01-01 [제3126호, 20면]

한 해를 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 교회는 성가정 축일을 지냅니다. 새해를 맞는 우리 모두가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특히 ‘가족사랑’의 의미를 곱씹어 마음을 정돈하라는 주님의 배려라 싶습니다.

오래오래 저는 오늘 복음 말씀을 참 좋아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처럼 어릴 적에는 부모님 애간장을 녹이는 자녀였으며 ‘똑 부러지게’ 말대꾸도 하는 평범한 아들이었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었달까요?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엄마 아빠의 사랑이 필요한 아기였으며 엄마 아빠의 돌봄이 필요한 아이였으며 때론 부모님의 속을 썩이기도 했던 소년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달까요?

그런데 까를로 까레또 수사가 쓴 “불쌍하신 마리아님! 그분을 육신으로 잉태하시기는 간단하셨겠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을 신앙으로 잉태하시는 일이었을 것입니다!”라는 글을 읽으며 마음이 철렁 쏟아져 내렸습니다. “길모퉁이에서 그 아이에게 오줌을 누이시며 바로 그 아이, 곧 당신의 아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온전히 믿을 수 있었겠느냐는 저자의 물음에 소름이 돋더군요. 성모님도 무조건 믿기 위해서 혼신을 다하는 극도의 투쟁이 필요했으리라는 사실이 제 마음에 차올랐습니다. 왜 믿음이 끝없는 도전인지, 어찌하여 철저한 투신인지를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사흘, 두 분의 심정이 어땠을지, 눈앞이 캄캄한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었을지 가늠이 되었습니다. 두 분도 분명히 무언가 잘못된 것 ‘같은’ 무언가 틀린 것 ‘같은’ 불안을 떨쳐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라 느껴졌습니다.

성경은 어린 예수님을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특출하고 비범하며 뛰어났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바와 같이 때론 부모님의 애간장을 태우기도 하는 평범한 아이였음을 짐작하도록 하지요. 그런 만큼 두 분은 하느님의 아들이 천지도 모르는 젖먹이가 되었다는 사실도 천진난만한 개구쟁이로 자라는 모습도 여엉 석연치 않게 다가왔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부모님께 ‘순명’하는 모습마저 실망스러웠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 같으면 충분히 그랬을 것이라 싶습니다. 그 대단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원대한 꿈도 포부도 없이 시시하게 ‘촌사람’으로 지내는 게 너무 허술해서 미덥지가 않았을 것이란 얘기입니다. 정말로 저였다면 ‘긴가민가’ 의심을 하고 또 했을 법하다는 얘기입니다. 그러고 보면 두 분께는 어린 예수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일이 가장 큰 시험이었을 것이라 싶은데요. 내처 세상과 이웃에게 예수의 신원이 탄로 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했으니, 그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 짐작이 됩니다. 감히 “하느님의 아들”을 몰라보는 세상 사람들의 ‘무엄함’에 열불이 나서 하루에도 골백번씩 두 분의 마음은 천당과 지옥을 오르내렸을 것도 같은 겁니다. 언제부턴가 행동지침을 알려주던 천사도 감감무소식이고, 그저 시골구석에서 아버지 일이나 거들고 있는 소인배의 모습에 실망했을 것도 같으니까요. 이야말로 두 분의 가장 큰 십자가였으리라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두 분이 지녔던 믿음의 무게가 더 진중하게 다가옵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율법학자들 가운데 선 예수’.

그런데 오늘 복된 성가정에 문제가 일어납니다. 하룻길을 가서야 예수님을 잃은 사실을 깨닫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날 두 분은 예수님을 찾았지만 그분은 어디에서도 만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습니다. 저 같으면 절대로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 싶습니다. 내가 그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예수님을 철저히 지켰을 것 같은 겁니다. 

그런데 뒤집어 생각하니 마음이 달라집니다. 이야말로 두 분께서는 우리 새끼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며 과잉보호하지 않았던 증거이며 시종일관 떠받들며 오냐오냐하지 않았던 방증이며 일일이 예수님의 행동을 간섭하지 않는 자녀사랑으로 예수님을 교육한 결과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독서말씀처럼 결코 “자녀를 들볶지” 않는 성숙한 부모님 자세를 감추지 못한 것이라 싶습니다.

“그리스도를 이렇게 섬기는 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고 사람들에게도 인정을 받습니다”(로마 14,18)라는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느님을 기쁘게 하여 사랑받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칭찬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은 이웃들로부터 듬뿍 사랑을 받는 존재로 살며 하느님께 인정받는 고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얘깁니다. 곧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께 잘해드리는 길이며 방법이라는 겁니다. 사랑이신 하느님께서는 도무지 잘난 것 없고 대단치 않은 우리를 당신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거룩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뽑아 주셨습니다. 하여 그분께 “사랑받는 사람답게” 세상의 모든 일들을 참아 주고 용서해 줄 힘을 주셨습니다. 세상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당신의 평화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이 모두가 은총입니다. 이 전부가 다 선물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는 두루두루 그분의 축복을 선심 쓰면서 살아갈 능력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든지 사랑해 주고 용서해 주면서 가진 것을 모두 퍼주고도 행복할 수 있는 비법을 소유한 하늘 시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주님을 모셨다면 생각과 언어에 그리고 행동거지에도 주님을 먼저 떠올리며 지낼 테니 말입니다. 삶 속에 주님을 모시고 살아간다면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격하시킬 수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날, 두 분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찾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곁에서 보이지 않는 바로 그 자리에서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혹여 미사가 끝나기 무섭게 예수님은 잊은 채 삶의 현장으로 뛰어든 것을 느꼈을 때, 미사에서 그토록 거룩하고 아름답고 고귀하던 모습은 내동댕이치고 몸만 빠져나왔다고 느껴질 때, 그래서 한 발짝씩 주님과 멀어진 채로 스스로 삶의 주인인 양 살아가고 있을 때…… 부리나케 주님을 찾으라는 당부입니다. 답답하고 갑갑한 상황에서 언제든지 재빨리 성전으로 달려오라는 주님의 호소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마리아와 요셉 성인의 허술함이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두 분마저도 예수님을 잃고 헤맨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위로인지요.

새해, 우리의 믿음이 열두 살 예수님처럼 쑥쑥 자라나서 믿음의 키가 소년 예수님처럼 훤칠해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꼭 하느님과 사람들에게 총애 받는 삶을 살아가시길 소원합니다. 문득 성모님과 요셉 성인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싶군요. 함께 하시지요.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윤리신학 박사를 취득하고 부산가톨릭대학 교수로 재임하면서 교무처장 및 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 Peace be with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