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주님 성탄 대축일 - 낮 미사
제1독서(이사 52,7-10) 제2독서(히브 1,1-6) 복음(요한 1,1-18)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12-25 [제3125호, 17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어쩌면 성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기로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찢어지게 쓰라렸을 하느님의 심정을 느끼는 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 거푸, 수도 없이 당신의 뜻을 묵살한 채, 일그러져 망가져 가는 세상을 달리 바라보신다는 고백이라 싶어 마음 한구석이 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복하시는 당신의 성심이 아기가 되어 우리 곁에 오신 것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오늘 이 기쁜 성탄의 밑자락에 고인 하느님의 성심을 헤아려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의 사랑이며 전부인 외아들을 땅에 벌거숭이 갓난아기로 보내시며 우리 하느님, 마음이 얼마나 쓰라렸을지, 가슴 아파하는 아버지와 작별했던 아들 예수님의 심정은 또 어떠셨을지……?

복음서 가운데 요한복음은 독특합니다. 오직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여주는 것에만 집중하는 사도 요한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습니다. 서두에서부터 복음의 생명력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문장을 읽으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리스도가 곧 말씀임을 밝히고 그분이 창세전에 이미 하느님과 함께 존재하신 분이심을 선포했던 사도 요한의 마음이 얼마나 벅차올랐을지…….

결국 복음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임을 일깨우려 했던 심정을 알 듯합니다. 복음이란 하느님께서 당신의 넘쳐나는 사랑을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인간을 위한 희생 제물이 되기로 결단하신 결과임을 온 세상에 선포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도 같은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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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거 쾨더의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2독서로 선택된 히브리서 1장에 ‘말씀’이라는 단어가 열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그날 사도 요한은 히브리서 저자가 사용한 그 말씀, 곧 한 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이며 세상의 빛이신 분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하려던 것이라 어림하게 됩니다.

사도 요한이 전하는 복음의 두 남자, 요한과 예수님, 그리고 그 두 분을 세상에 보내 주시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사용하신 두 여인을 생각해 봅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생각하면 할수록 기구하기 짝이 없는 여인의 삶을 살았던 인물인데요. 어쩌면 엘리사벳은 아이를 갖지 못하는 석녀로 살아야 했던 처지에서 늘그막에 임신을 하게 된 일마저, 망측하고 민망해서 석 달을 꼭꼭 숨어 지낸 게 아닐까 추측하게 합니다. 뿐입니까? 처녀의 몸으로 덜컥 아이를 갖게 된 마리아도, 차마 복되다 여겨지진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처지에서 만난 두 여인의 대화가 범상치 않습니다. 꼬여 든, 어렵고 곤란한 처지를 하소연하지도 않고 팔자를 한탄하지 않고 왜?라고 묻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다만 ‘말씀’이신 그분을 향한 ‘말의 찬미’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말입니다. 아닌 말로 그런 장면을 누군가가 보았다면 “별꼴 다 보겠네”라고 비아냥댔을지도 모를 일이라 싶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내야 할 생각과 말과 행위의 표양이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은 성모님처럼 말씀이신 예수님을 몸 안에 모시고 살아가는 존재이니까요. 엘리사벳처럼 상대 안에 계신 그분을 알아 뵙는 존재이니까요. 그리스도인은 무엇에든 어떤 상황에서든, 두 분처럼 말마디 마디마다 ‘말씀’이신 그분의 생명력을 불어넣어 대화해야 한다는 걸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적으니 교우 분들께서 오늘 잠에서 깨어나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지는군요. 상대에게 말을 건네며 말씀이신 그분을 기억하셨는지 여쭙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한층 고상한 어투를 사용하셨는지, 여쭙고 싶은 겁니다. 한 마디의 말을 건넬 때에도 말씀이신 그분을 기억하여 표현하셨는지 여쭙고 싶은 겁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순간순간의 들숨날숨마저 봉헌하는 복음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고, 말 한마디 한마디에도 예수님의 것으로 단장시켜 건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안에 계신 주님께서 꼭 그리되기를 간곡히 바라고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서로서로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존재 안에 세상을 초월하시는 무한한 하느님의 관심과 돌보심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은 땅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위’를 향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신앙은 세상에서 몹시 보잘것없는 내가, 엄청나게 크신 그분을 바라보며 그분과의 관계를 기억하며 지내는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 담겨 있는 최고의 격려와 축복의 단어는 “임마누엘”이라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주님의 고백이니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이제는 내 힘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그분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약속이니 얼마나 엄청난 은총인지요?
이제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이 되도록, 우리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생명력을 살기 위해서 우리의 언어에 당신의 향기가 첨가되기를 기대하십니다. 우리의 대화가 천국의 향연이 되기를 꿈꾸고 계십니다. 하여 말로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일 따위가 근절되기를, 예수님이신 말을 자기 자랑이나 비아냥거리는 일에 소비하는 어리석음이 사라지기를 진심으로 소원하십니다.

때문에 저는 오늘 아기 예수님을 만나 경배 드리려 구유 참배를 드리기 전, 먼저 하늘을 올려다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위해서 온 우주를 섭리하시는 그분의 손길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결코 어제와 똑같은 바람도, 어제와 똑같은 햇살도 없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놀라며, 끝없는 하느님의 자비와 영광에 찬미 바치시길 바랍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이 아기가 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땅에 오신 하느님의 말씀, 아기 예수님은 지금 우리 안에 성체로 함께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말 한마디에도 성모님처럼 예수님의 사랑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그 무엇도 소중해 하지 않으신 예수님처럼 살 수가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더 잃기 위해서 더 놓기 위해서 애쓰는 힘센 신앙인의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홀로 창조하신 세상을 이제 우리 모두와 더불어 사랑으로 채우고 싶어 땅에 오셨습니다. 교회인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직무에 충실하기 위해서 분주하던 일손을 멈추고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고대하며 기다렸습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제일 먼저 맞아들이는 복된 임무를 맡아 정성껏 수행할 것입니다.

성탄, 태초부터 말씀으로 존재하셨던 바로 그분이 오늘 우리의 삶에 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나를 위해서 맨몸으로 땅에 오신 말씀, 아기 예수님이 우리의 말 때문에 울음보를 터뜨리지 않게 되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보는 우리의 눈매가 사랑이신 하느님의 닮아, 촉촉해지시길 소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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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윤리신학 박사를 취득하고 부산가톨릭대학 교수로 재임하면서 교무처장 및 대학원 원장을 역임했다.

                                                                                                " Peace be with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