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우리’가 권력이 될 때

연중 제26주일
(제1독서) 민수 11,25-29 (제2독서) 야고 5,1-6 (복음) 마르 9,38-43.45.47-48

‘우리’를 지키기 위한 이기심과 독선 경고
‘우리’가 권력이 될 때 어둠을 몰아낼 수 없어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09-23 [제3113호, 15면]

‘우리’라는 단어 안에는 ‘배타성’이라는 금기가 은밀히 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유지하기 위해 견고한 철벽을 치고 그 어떤 이질적 존재도 침입하지 못하게 감시함으로써 또 다른 소외와 변방을 만들어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공동체와 진정으로 민주적인 연대는 ‘우리’ 안에 낯설거나 열등한 것, 그래서 아름답지 않은 것이 들어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은 ‘우리’를 지키기 위해 하느님의 자유마저 통제하고 제한하는 인간의 이기심과 독선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실, 하느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하느님을 통제하고 제한하려는 유혹은 인류의 역사 안에서 늘 있어왔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라는 폐쇄적 자의식을 고수하기 위해,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자신들에게만 허락된 것으로 제한하려는 폭력을 섬뜩할 정도의 성실성으로 유지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위험한 선민의식에 대하여 예수님은 “그런 생각일랑 하지마라…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마태 3,9)고 일갈하신 바 있습니다. 오늘 본문들 안에서도 예수님과 모세는, 하느님의 선물과 은총은 결코 인간의 질투나 경쟁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더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을 받은 이들을 시기하여 집단적으로 소외시키거나 제거하려는 파괴적 근본주의와 편협한 우월의식은 복음일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 복음의 맥락

마르코 복음의 문학적 구성은 지리적 이동을 통해 전개되며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기 전 갈릴래아 선교활동(7,24-10,52)의 마무리 부분에 속합니다. 내용상으로 전반부(38-41절)와 후반부(42-48절)로 구분되는 이중구조를 드러내는데, 전반부는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라’는 권고(33-37절)와 후반부(‘작은 이들을 죄짓지 말게 하라’는 내용, 42-48절) 사이에 첨가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반부를 빼고 읽으면 앞뒤 내용이 보다 자연스럽게(‘어린이’ 이야기→‘작은 이들’ 이야기)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흐름을 방해하면서까지 전반부를 첨부할 이유가 있었을 것인데, 이를 파악하는 것은 본문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는 ‘배타성’과 ‘당파성’, 그로 인한 환멸과 상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소외된 주변부 사람들을 ‘어린이’와 ‘작은 이들’에 연결시켜 이해하면서, 당시의 심각한 배타주의와 집단주의의 폐해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 편협한 집단의식, 그리고 배타성

사건은 예수님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 요한의 말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이 제자단에 속하는 이가 아니었기에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 보려고”(마르 9,25) 했다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단에 속한 이는 아니었지만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믿고 고백하는 이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적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문제이거나 교의와 관련된 것이 사건의 핵심이 아니라, 당파성과 정통성에 대한 문제, 곧 ‘우리’와 다른 집단의 사람이 은총과 구원의 수혜자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임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막지 마라.”(9,39) 아무리 “작은 이”(9,42)라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이라면 그분을 “지지하는 사람”이며, 더 나아가 그런 “작은 이”라 할지라도 그를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42절)

여기에서 “작은 이”로 번역된 그리스어 ‘미크로스’는 단순히 ‘외형적 작음’, ‘어린이’, ‘아동’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회의 하층민들, 열등하다고 폄하된 이들, 무가치하다고 치부된 이들까지 포함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통해 마르코는 두 부류의 인간 군상을 노골적으로 대조시키는데, 다른 사람들과 비교되어도 전혀 위축될 필요 없이 자부심과 당당함으로 무장한 이들과, 반대로, 어떤 그룹에 속해있다는 것이 누(漏)가 되고 죄송해서 늘 불안하게 버틸 수밖에 없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후자에 속한 이들을 “막지 마라!”고 하시며 파격적 똘레랑스(관용)의 진수를 보여주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40절)

■ 영적 허영심과 은총의 독점

오늘 제1독서의 본문은 민수기의 유명한 광야 장면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매일 먹어야 했던 만나에 싫증이 난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먹었던 고기와 야채를 그리워하며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이제 그들에게, 자유로운 백성이 되는 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않은 듯합니다. 모세 자신도 지쳐서 하느님께 절박한 탄원을 하고, 그 응답으로 장로 70명이 임명됩니다. 이 임명은 모세를 줄곧 동반했던 영을 그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이루어지는데, 문제는 “명단에 들어 있으면서 천막으로 나가지 않은”(민수 11,26) 엘닷과 메닷에게까지 “영이 내려” 머물면서 시작됩니다.(28절)

‘영이 내려 예언을 시작했다’는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특권이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순명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그런 권위가 주어진 것을 이스라엘의 충실한 이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본문은 엘닷과 메닷이 순명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알려주지 않는데 이는 본문의 주제와 큰 연관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왜 천막에 가지 않았느냐가 아니라 누구에게도 제한받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자유’에 대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주심에 있어서 늘 자유로우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들에게 영이 내리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피력하는 여호수아의 말은, 언뜻 매우 합당한 의견같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감히 하느님의 자유를 제한하고 판단하려는 인간의 과도한 자의식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면서 결국 하느님을 규제하는 과오와 왜곡의 유감에 빠졌던 것입니다.

이때 모세의 태도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29절) 모세는 이 말을 통해 온갖 종류의 질투나 소유욕, 특별히 영적 허영과 특권 의식이 갖는 모순적 감정을 단호히 거부하며 인간의 고결함과 품격을 완성합니다.

모든 것이 상식적이고 정상적이어야 은총과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의 상식과 질서가 다른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소외와 폭거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기꺼이 다름과 결핍, 더러움의 흔적을 포용하는 것이야말로 구원과 은총을 가져다주는 거룩함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함은, 지독하게 한결같은 맹목적 성실함과는 대치되는 덕목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단단하고 열정적 신념이라 해도 ‘우리’의 생각만을 집요하게 추구하는 체제 수호적 신념이라면, 세상의 죄와 실패에 질색하는 독선과 잔인함만을 양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연대와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대신하는 권력이 될 때 결코 인간 스스로는 어둠을 몰아낼 수 없습니다.



김혜윤 수녀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장)
※ 김혜윤(베아트릭스) 수녀는
로마교황청립성서대학원(S.S.L.)에서 성서학 석사를, 우르바노 대학교(S.T.D.)에서 성서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광주가톨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에서 소임하고 있다.

                                                                                                   " Peace be with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