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필요’와 ‘필수’의 차이

연중 제18주일
제1독서: 탈출 16,2-4.12-15 / 제2독서: 에페 4,17.20-24 / 복음: 요한 6,24-35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08-05 [제3106호, 15면]

‘필수’적인 것은 ‘필요’한 것일 수 있지만, ‘필요’한 것이 다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것을 너무 쉽게 취하게 되면 우리 삶에서 정말로 ‘필수’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잊고 살게 됩니다. 독재와 억압, 자유와 해방 사이에도 독특한 연계가 있는데 자유로운 상황에서도 노예처럼 살아가는 이가 있는가 하면 독재와 핍박 속에서도 존엄을 유지하는 자유인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파라오의 노예 상태에서 하느님 백성으로의 ‘건너감’을 광야에서 체험합니다. 오늘 전례의 본문들은 이 건너감이 ‘빵’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려주는데,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빵을 요구하고(제1독서) 군중은 예수님께 빵을 요구합니다.(복음) 빵이 인간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빵만을 추구하다 보면, 정녕 삶에서 ‘필수’적인 것, 즉 ‘하느님께서 그 필요(빵)를 충족시켜 주시는 분’이심을 망각하는 과오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용할 양식’을 충족시켜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잊지 않는 것, 삶 전반을 압도하고 관통해야 할 ‘필수’적 진리입니다.


■ 복음의 맥락

요한복음에서 ‘찾음’은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며 복음서의 시작과 종결 부분도 ‘찾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수미상관首尾相關적 구성) 예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이 제자들에게 “무엇을 찾느냐?”(1,38)였고 마무리 부분에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하신 말씀도 “여인아… 누구를 찾느냐?”(20,15)였습니다. 이를 통해 요한복음서가 줄곧 추구한 것은 ‘찾음’이라는 것, 그 찾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 확인됩니다. 빵을 많게 하신 기적 후 군중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그분을 ‘찾아’ 호수 건너편까지 몰려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전날 있었던 빵의 기적을 자세히 설명해주시면서 우리가 정녕 ‘찾아’야 할 것은 ‘빵’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임을 분명히 가르쳐주십니다.


■ 무엇을 찾는가

사실 군중은 자기들의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로 예수님 주변에 머뭅니다. 호수 건너편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에게 이득 될 만한 것,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만을 찾을 뿐 그 이상의 의미를 추구하지 못합니다. 물론 생존을 위해 일용할 양식을 얻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이를 하느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6-27) 사실 ‘기적’은 하느님께서 인간들 사이에 현존하고 계심을 드러내는 하나의 ‘표징’일 따름입니다. 예수님은 군중 각자의 문제를 해결해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현존을 알려주기 위해 오신 분이고, 이를 은유적으로 가시화한 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조금씩 파악하기 시작하면서 군중은 질문 하나를 더 던집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사실 유다인들은 토라(율법)의 준수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믿고 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이란 어떤 것을 준수하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29절)이라고 하시면서 기존의 통념을 수정합니다. 이어서 자신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고 천명하시는데(32-33절), 여기에서의 ‘생명’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우리의 모든 영적 갈망과 배고픔을 채워주는 힘을 말합니다. 다른 물질이나 존재는 인간에게 완벽한 만족을 주지 못하고, 그 갈망이 응답받지 못할 때 더 구차한 허기와 갈증을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모신 이는 생명 자체이신 분을 소유하고 있기에 모든 필요가 충족되고 더 이상의 배고픔과 갈증도 느끼지 않게 됩니다.

헨드릭 드 클레르크의 ‘만나를 모으는 이스라엘 백성’.

■ 결핍과 가난, 하느님을 찾는 은총

‘만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표징이었습니다. 광야에 있던 그들은 ‘혼자’가 아니라 모든 역사와 시·공간에 충만히 존재하시는 분과 ‘함께’였고, 이를 보증해주던 것이 만나였던 것입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 이집트는 언제나 풍요의 상징이었습니다. 그곳을 빠져나온 이스라엘은 배고픔과 목마름에 지쳐 모세와 아론에게 자주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자유를 위한 여정은 가혹하고 험난했으며 빈곤과 결핍, 그로 인한 불안과 의혹에 시달려야 했는데, 하지만 빈곤과 결핍이야말로 인간이 인정해야 할 본연의 조건이며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 인간은 그 누구도 스스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마련할 수 없습니다. 무능과 한계를 제대로 인식한 극한의 상황을 마주하고야 비로소 자신이 하느님이 아님을, 아니 하느님일 수 없음을 자각하게 된 것이 광야가 주는 미덕이었습니다.

한편, 온전히 하느님의 선물이었던 ‘만나’는 하느님의 ‘시험’이기도 했습니다. 그날 하루의 분량 이상을 거두어들일 수 없게 함으로써 하느님에 대한 그들의 ‘종속’을 지속적으로 인식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 헛된 마음과 새 인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후,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줄곧 물리적 억압과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시는 ‘해방자’로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제2독서는 이러한 물리적이고 현실적인 해방을 보다 통합적인 차원에서 완성하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표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헛된 마음”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즉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삶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혼동하게 하는 우상에서 벗어나, 진정하고 궁극적인 삶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탈출기가 제시한 것처럼 인간 스스로는 먹을 것도 마실 물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지혜롭게 인식하고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영과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 즉 “새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에페 4,22-24)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신 ‘성체’가 모독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불온하고 불경스럽게 군다고 다 파격이 되고 혁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설사 지독한 상처가 있어서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지지할 수도, 연민을 가질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초유의 사건에 마음 불편해하면서도 이내 내 안에서 발견되는 무지와 오류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성체를 제대로 인식하고 경건히 모시고 있는지, 어쩌면 예수님에게 일상이 되었던 모욕과 비난, 훼손과 증오가 여전히 내 안에서도 반복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누군가를 험담하고 누군가의 인격을 모독할 때, ‘빵’에 대한 본능적 필요만을 위해 기복적으로 하느님을 찾을 때,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희롱당하고 희생되십니다. 무지하고 무례했던 소행에 분노하며 단호한 응징으로 더 심각한 자극을 유발하기보다, 현실의 ‘필요’만을 내세우고 ‘필수’적 진리를 놓쳐온 나의 경박함과 어리석음에 통렬히 저항하는 것, 어쩌면 삶의 본질을 움켜쥐기 위한 가장 집요한 투쟁이며 진보의 시작이 아닐까 합니다.

※ 김혜윤(베아트릭스) 수녀는
로마교황청립성서대학원(S.S.L.)과 우르바노 대학교(S.T.D.)에서 수학한 후 광주가톨릭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미리내성모성심수녀회 총원에서 소임하고 있다.

                                                 " Peace be with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