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원하는 대로 주셨다”

연중 제17주일 
제1독서 (2열왕 4,42-44) 제2독서 (에페 4,1-6) 복음(요한 6,1-15)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07-29 [제3105호, 15면]

람베르트 롱바르트의 ‘오병이어의 기적’.

오늘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많은 군중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먹이시며 당신이 누구신지 드러낸 사건입니다. 때는 마침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자신들을 이끌어내신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기리는 파스카 축제가 근접했을 때 일입니다. 우리도 군중 중에 한 사람이 되어 그 사건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출발의 동기는 단순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징들이었지만(2절), 그분이 주시는 빵을 나누는 동안 따름의 목적이 더 선명하고 깊어지기를 갈망하면서 말이지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한 질문입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5절) ‘어디’는 단순히 빵을 구입할 수 있는 상점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스승과 제자의 대화에서 인간의 판단과 주님의 능력 사이에 큰 간격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조심스럽게 말하는 제자들의 대답에 별다른 반응이 없고 당신이 해야 할 일에만 부지런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군중들에게 풀이 많은 그곳에 자리 잡게 하십니다. 몸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앉는 자세는 자유로운 인간의 고유한 본성 상태를 의미합니다. 인간은 내적으로 자유로운 상태일 때 자신을 바라보고 또 그분에게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11절) 공관복음과는 좀 다른 이 11절의 상황묘사는 우리를 특별한 신비에 집중시킵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빵을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나누어 주십니다.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 혼자 빵을 나누어 주실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신학적 영성적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사가는 예수님의 이 행위에 더 깊은 뜻을 전달하려 한 듯합니다.

‘들고’라는 단어는 미완료 과거 형태입니다. 빵이 갑자기 많아져 사람들에게 줄을 세워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라 높이 쳐든 당신의 손에서 계속 떼어 줌을 말합니다. 빵이 당신으로부터 나오고 그 빵이 당신의 몸이 됩니다. 즉 예수님 스스로 빵이 되고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당신 스스로 생명의 빵을 주는 유일한 기증자가 됩니다. 복음사가는 그것이 한 번만이 아니라 미래 당신의 식탁에 초대될 이들에게도 계속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계속 이어질 이 선물은 확실하게 그분으로부터 그분의 사랑에서 온다는 의미를 더하고 있는 것입니다.(요한 13,1)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요? 높이 든 빵, 아니면 그분. 

“원하는 대로 주셨다.”(11절) 무엇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제 자신에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갈망하기에 주님의 식탁에 모였고, 무엇을 갈망하기에 그리스도를 사는가? 하고 말입니다. 내가 무엇을 갈망한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내 안에 내재해 있고, 그것에 의해 더 충만하기를 바라기에 가능합니다.

그리고 빵을 손에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는 행위도 공관복음과는 다르게 전해집니다. 하늘을 향해 눈을 들어 올리지도 아버지께 기적의 빵을 청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감사기도를 드릴 뿐입니다. 우리는 이 행위를 통해 그분의 정체성을 알게 됩니다. 온몸을 내어주시고, 온몸으로 당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셨고, 그 사람이 다시 빵으로 계시된 것이지요. 우리를 “사람이 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다가가고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계시 헌장, 2항)”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선을 따르는 신적 본성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보이는 외적인 것만으로 전부 설명될 수 없고 드러나는 능력만으로 정의될 수 없습니다. 나를 설명하려면 하느님을 설명할 수밖에 없고, 나를 알려면 하느님을 알아야만 합니다. 나는/인간은 자신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타자를 향하여 열고 나아가는 도전하는 존재입니다. 몸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내어줌의 성장을 거듭할 때 자신을 넘는 무한의 힘을 체험합니다. 인간 존재의 충만함과 완전함에 머무는 것이지요.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을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남은 조각”(12절), 이제야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들을 모아들이라는 사명이 맡겨집니다. 함부로 버릴 수도 함부로 대할 수도 없는 귀한 ‘조각’입니다. 빵은 처음부터 하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2독서, 4절) 부활하신 후,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그들이 잡은 물고기를 가져오라 하셨지만 빵은 당신이 준비하셨습니다.(요한 21,9-13) 하나 되기 위해 쪼개진 빵입니다. 거둬들이는 것은 제자들, 곧 우리들의 몫입니다.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13절) 숫자 ‘열둘’은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4곱하기 3으로, 4는 동서남북을, 3은 삼위일체 신앙고백을 하는 이들의 믿음을 말합니다. 여기저기 넘쳐야 하는 충만입니다.

이 충만은 빵으로만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질은 그 자체로 충만을 주지 못합니다. 물질이 갖는 속성이요 내가 물질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것이 물질에 길을 비추어줄 때 충만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으로부터 오는 창조적인 감동이 있을 때 가능해집니다.

바르티매오(마르 10,46-52)라는 눈먼 거지가 길을 열어주네요. 주님이 지나간다는 소리를 듣고 그는 많은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로 주님을 부릅니다. 예수님이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바르티매오는 갈망에 찬 목소리로 청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빵이나 동전 몇 닢을 구걸한 것이 아니라 다시 볼 수 있게 해 달라 청했습니다. ‘치유’가 아닌 ‘구원’, 곧 자기 자신을 본 것입니다. 근원으로부터 자신 안에 내재된 좋음(善)을 보았고 이제 그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회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갈망에 찬 믿음과 말씀의 은총이 만나 새로운 삶의 여정이 열린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주신 것입니다!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살펴야겠습니다.

※ 김혜숙 선교사는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신학과 교황청립 안토니오대학 영성학과를 졸업하고,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이며, 대전가톨릭대 혼인과 가정대학 신학원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김혜숙(막시마) 선교사                                         " Peace be with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