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연중 제13주일(제1독서 지혜 1,13-15; 2,23-24 / 제2독서 2코린 8,7.9.13-15 / 복음 마르 5,21-43)

서로 다르게 창조됨은 ‘둘이 한 몸이 되라’는 의미
남과 여, 하느님 바라볼 때 인격적 사랑할 수 있어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07-01 [제3101호, 15면]

웬젤 피터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일부.
우리는 새해 첫날을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1월 1일, 1독서)라는 복된 약속으로 시작했습니다. 딱 반년이 지난 이 시간, 새해의 결심은 어렴풋하고 다리의 힘은 점점 빠져만 갑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렇게도 적절할까요. 오늘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들은 인간이 누구인지 그 근원을 바라보게 합니다.

1독서 말씀,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지혜 2,23)는 자연스럽게 창세기 1장 27절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에 오르게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외국생활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지던 유다인들에게 지혜서는 자신들의 존재, 정체성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새롭게 하기 위해 오늘 묵상은 나를, 나를 만드신 분의 눈으로 보려 합니다. “당신 본성”,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성성(聖性)과 선성(善性)이 인간에게, 남자와 여자에게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동등하게 인격적으로 주어진 이것은 하느님 당신이 원했던 것이고, 계획이었습니다. 그분의 거처가 바로 나입니다.

태어날 아기가 어느 나라에 태어날 것인지 선택할 수 없듯이 성(性)도 그렇습니다. 창조로 받았습니다. 창조는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입니다. 남자와 여자, 성의 다름에 하느님이 들어왔습니다. 왜 다르게 주어졌는지 성의 상이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오늘 나의 삶을 보다 더 낫게 할 수 있습니다.

본성의 관점에서, 성의 상이성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몸의 형태만 다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도 표현하는 말도 행위도 다름을 의미합니다. 여성은 남성과 다른 방식으로 아름답습니다. 남성도 여성과 다르게 멋집니다. 다른 것이 정상입니다. 이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자신 안에 갇혀 자신의 위대함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서로 다르게 창조하신 하느님의 계획은 둘이 한 몸이 되라는 사명입니다.(창세 2,24 참조)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그 자체가 완전한 완성에 도달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곧 인간은 친교를 통해 자신을 초월하는 지점에 이를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서로 다르지만 서로의 완전한 친교가 한 하느님으로 드러나듯 인간들도 하나 되는 것이 사명입니다. 하나, 혹은 일치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 관계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 넓은 의미로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 이웃과 이웃의 관계, 나라와 나라와의 관계, 그 어떤 관계든 사랑할 때 가능하고, 사랑할 때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남자와 여자는 서로 자신의 반쪽을 찾아 자신에게 상대를 통합, 통제하기 위해 갈망하고 만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서로 다르기에 인격적 사랑이 가능합니다. 두 사람의 모상인 그분을 바라볼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남자의 최종 척도가 여자일 수 없고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에서 남녀의 성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도 하느님의 모습이 남자와 여자에게 있고, 남자와 여자가 사랑할 때 하느님의 모상이라 하셨습니다. 결국 자신의 몸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성을 통해 자신과 타자를 알게 되고, 하느님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그래서 재미도 기쁨도 슬픔도 고통도 있습니다. 나의 계획이나 생각과 상관없이 타자에 대해 매력을 느끼고 호감을 갖게 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이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모성성을 일러줍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가 알 수 없는 하느님의 부성성을 일러줍니다. 사랑이 나를 넘는 것이고 두 사람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를 이루어 오누이처럼 됩니다. 뿌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동물들이 지나갈 때 이름을 지어준 후, 자신과 닮은 것이 없음을 알고 외로워합니다. 동물과 사람의 성이 다름을 알았던 것입니다. 동물의 암컷과 수컷은 평생을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한평생 함께 하려 지독히 노력합니다. 동물은 새끼에게 젖을 먹일 때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자녀에게 젖을 먹일 때는 얼굴과 얼굴과의 만남입니다. 젖만 주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보고 자녀의 안녕을 살피고 사랑을 공감하고 나눕니다. 그러므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일은 중요합니다. 성도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을 닮은 남자와 여자는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됩니다. 그러나 어떤 여자도 남자를 다 채울 수 없고 어떤 남자도 여자를 다 채울 수 없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자신을 초월하는 곳에 열려야 함을 말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신비가 우리가 도달할 최고 이상을 향해 열어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초월할 때 하늘과 땅을 잇고 너와 나를 잇습니다. 생명이 흐르는 내 몸은 이토록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 생명에는 진리가 들어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담으신 것입니다. 나의 몸을 받아들일 때 이미 하느님을 받아들였습니다. 닿아야 할 목표가 분명해졌습니다. 만약 이 목표를 바라볼 수 없다면 서로 주도권 싸움을 하며 생명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 생명력은 힘을 잃을 것입니다. 복음에서 하혈하는 여인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시대 많은 이들이 하혈하는 여인처럼 자신에게 든 생명(피)을 헛되이 소모하고 있습니다. 여인은 생명이 흘러내리는 부끄러움을 그대로 안고 아주 절실함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습니다. 그녀의 믿음과 용기에 예수님은 그녀와 인격적 만남으로 답합니다. 여인은 자신의 존엄한 인격을 새롭게 인식합니다.

구원받은 몸이 완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에서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콜새 1,15)라고 찬미합니다. 내가 그분을 만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태초의 완전한 진리, 역사적이고 변하는 모든 것들을 거슬러 영속해 있는 진리에 따라 존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을 통해 우리에게 새겨진 하느님의 본성을 되찾고 새롭게 하기 위해 일어납시다. 처음 희망했던 그 길을 다시 걸어야겠습니다.

탈리타 쿰!



김혜숙(막시마) 선교사
※ 김혜숙 선교사는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신학과 교황청립 안토니오대학 영성학과를 졸업하고,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 이며, 대전가톨릭대 혼인과 가정대학 신학원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 Peace be with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