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주보(제2168호), 2018년 4월 1일(나해) 주님 부활 대축일


(생명의 말씀)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마르 16,4)


*글:  구요비 욥 주교 | 서울대교구 보좌주교


지난 대림절에 한국 교회는 ‘낙태법 폐지 반대 100만인 서명 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그리고 추운 겨울에 이런 캠페인을 한다는 것은 이를 주관 하는 분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고 

‘너무 무모하지 않은가?’라는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제가 아프리카의 부르키나파소(Burkina Faso)를 방문하고 귀국하니, 서명자가 100만 명을 넘어섰다는 낭보(朗報)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불과 두 달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이건 엄청난 기적이야…”라는 탄성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지난 사순절 내내 저는 자주 오늘 복음의 말씀을 되새김질하였습니다.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누가 그 돌을 무덤 입구에서 굴려 

내 줄까요?’ 하였다. 그러고는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마르 16,3-4 참조) 자신의 생명을 보호할 아무런 

힘이 없는 지극히 나약한 태아를 위한 100만인 서명 운동에서 이 말씀이 실현되고 있음을 믿고 고백하게 됩니다. 


죽음의 한계 안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인간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보다 더 강한 참 생명이 있음을 일깨워주는 전대미문의 새로움이요. 

기쁜 소식(福音)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신약성경의 가장 오래된 전승에서 바오로 사도는 놀랍게도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 

죽은 이들의 부활을 먼저 전제합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코린 15,13.16) 플라톤의 ‘영혼 불멸’이나 드라마, 

영화에 자주 나오는 환생(re-incarnation)설이 어쩌면 죽음을 넘어서는 영원한 삶을 향한 인간의 근원적인 갈망과 희망을 표현한다면, 

이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전이해(前理解)라고 하겠습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표현은 대개 현실적으로는 어렵고 실현 불가능 해 보일지라도 

‘이것을 안 하면 안 되겠기에!’, ‘비록 어렵지만 해야만 된다!’라는 마음속 깊은 곳의 울림 때문에 행동으로 나서는 경우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삶과 인간의 역사를 적극적으로 짊어지고 살려는 분들의 생(生)의 긍정과 생명의 도약(Élan vital) 안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인간의 행동은 근원적으로 ‘욕구의 종점은 선(善)이다’(성 아우구스티노)라는 통찰처럼 인간의 선성(善性)에서 흘러나옵니다. 

이는 우리 인간성 안에 깊이 내재해 있는 사랑의 힘을 솟구치게 하고 비록 자신의 한계와 무력을 뼈저리게 체험하면서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는”(로마 4,18) 부활 신앙과 만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 안에서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온전히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이시고 그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당신 외 아드님의 전적인 순종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응답이 곧 예수님의 부활이며 이분 안에서 하느님의 영원 한 생명이 온 인류와 

세상 안에 흘러넘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참 생명은 하느님 아버지와 일치하며 그분과 하나됨 안에 있음을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계시합니다. 


                                                                  " Peace be with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