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주보(제2166호),  2018년 3월 18일(나해) 사순 제5주일


(생명의 말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글:  최규하 다니엘 신부 |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수


길을 오가는 이들의 가벼워진 옷차림과 밝아진 표정을 보니 이제는 정말 봄인가 봅니다. 

신학교 교정도 곧 싱그러운 봄 향기에 물들겠지요. 곳곳에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과 푸릇푸릇한 싹들, 

그리고 그 속을 온통 헤집고 다니는 하늘이와 사랑이(신학교에 거주하는 두 마리의 귀엽고 온순한 리트리버입니다)가 

한데 어우러져 빚어내는 신학교의 봄 정취는, 생각만으로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신학교 교정을 산책하다가 여기저기 피어난 꽃들과 나무들을 보면 신기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언뜻 보면 모래 알갱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 조그맣고 딱딱한 씨앗에서 도대체 무슨 조화로 저렇게 아름다운 꽃들과 우람한 나무들이 나왔을까 하고 생각하면, 

그 생물학적인 설명과는 별개로, 이 조그만 씨앗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손길이 경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밀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의 온기를 거의 느낄 수 없는 그 메마르고 조그만 것을 

흙에 파묻고 물을 주기만 하면 어느 순간엔가 싹이 트고 자라나 큰 줄기를 이루게 되고, 마침내는 수십 배의 열매가 그 위에 

영글어갑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지. 


하지만 밀알 하나가 꽃피워내는 이 생명의 신비는,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밀알 자신의 죽음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단단한 껍질, 모든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던 그 믿음직한 보호막이 속수무책으로 해체되는 두렵고 

당혹스러운 경험을 거치지 않고서는, 밀알은 결코 자신 안에 감추어진 놀라운 생명의 힘을 끄집어낼 수 없습니다. 

고집스럽게 껍질 안에 숨어 전전긍긍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만 한다면, 밀알은 결코 ‘밀의 씨’라는 진정한 자아를 만나지 못하고 

무생물도 생물도 아닌 메마른 모습으로만 머물러 있다 허무하게 스러져갈 것입니다. 


아집과 교만에 사로잡혀 나 자신을 놓지 못하고 하느님의 손길에 맡기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은 마치 싹을 틔우지 못하고 씨앗으로만 

머물러 있는 밀알과도 같습니다. 자기 합리화와 지나친 자기애, 그리고 안락함에의 추구가 여러 겹의 껍질이 되어 나를 단단히 감싸고, 

그 안에 갇힌 나는 공허한 자기 위안에 사로잡혀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며 하느님을 만나지도, 진정한 나를 깨닫지도 못하니, 

이것이 과연 우리가 추구하는 충만한 삶의 모습일까요. 


은혜로운 회개의 때인 사순 시기가 이제 절정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아프고 부끄럽겠지만, 자신을 감싸고 있던 위선과 자기변명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자신의 죄와 부족함을 고백하며 주님 앞에 선다면, 그분은 우리의 회개를 값진 화해의 선물로 

받아들이실 것입니다. 바로 그 화해의 자리에서 영원한 생명의 싹이 트고 자라게 될 것입니다.


                                                                    " Peace be with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