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무엇을 품고 있는가? / 사순 제4주일

(2역대 36,14-16.19-23 에페 2,4-10 요한 3,14-21)
어둠은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나간 우리의 모습
그분께로 방향을 맞춰가며 회개하는 삶 살아야

가톨릭신문 발행일2018-03-11 [제3085호, 18면]

오늘 묵상은 “니코데모와 이야기하시다”의 후반부입니다. 후반부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중요한 변화를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11절에서입니다. 11절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이렇게 ‘너’라는 단수로 시작하지만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고 복수로 마무리됩니다. 이는 니코데모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를 다시 바라보고 그 핵심에 들어오라는 초대입니다. 이 초대에 우리도 함께 갈까요?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니코데모는 적어도 외적으론 훌륭한 종교인이고, 산헤드린 의회 의원으로서 명예가 있었으며, 지도자였고 부자였습니다.(3,1.10;7,50; 19,39) 그는 계시를 개념으로 파악하고 그것에 묶여버린 외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대변합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을 보면 세상의 것을 다 갖고 있었지만 편안하거나 행복하지는 않았던가 봅니다.

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에서는 대홍수 이후 하느님께서 노아와 계약을 맺으실 때의 무지개(창세 9장), 광야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구리 뱀(민수 21,4-9), 그리고 지금은 사람의 아들이 지셨던 십자가 구원의 메시지로 연결됩니다. 무지개, 구리 뱀, 십자가는 그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바라볼 수 있지만 모두가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듣고도 쳐다보지 않는 사람,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 듣고 바라보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다르게 행동하게 할까요?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지만 다 구원되지는 않습니다. 구원이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말씀이 생명이 되어 그 사람 안에 들어갔을 때, 그 힘에 의해 바라보는 자만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뱀이 들어 올려짐을 사람의 아들로, 구리 뱀을 달아맨 기둥을 십자가로, 뱀을 바라보는 이들이 사람의 아들을 바라보는 믿는 이들로 대비되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는 자신의 저 깊숙한 내면을 바라볼 때 알게 됩니다. 앎을 통하여 자신을 열 때, 처음부터 선재하셨던 생명을 발견하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15절을 봅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믿음은 힘, 능력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합니다. ‘영원함’(αίώυιον)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새로운 시대에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것입니다. “생명”으로 번역된 조에(ζωή)는 새롭고 결정적(최종 완성을 향한) 삶이 있습니다. 땅에 살지만 하늘의 질서를 따르는 이들에게 가능한 삶이지요. 즉 믿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생명의 근원이며, 죽음을 초월하는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살게 됩니다.(5,24절 참조) 이미 지금, 그래서 이 땅에서 믿음을 받아들이고 고백한다는 것은 자연적인 것 안에 초자연적인 삶이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2독서가 그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믿는 이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 사랑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안다’라고 말할 때는 체험이고 상대와 온전히 결합하는 것이며, 게다가 현재형으로 쓰인 걸 보니 지금 현재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복 강조되고 있습니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들어있음을 말합니다. 사람의 아들 안에서 존재와 유한성을 뛰어넘는 인간의 영원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약하고 잘못도 많지만 무한과 영원을 갈망하는 ‘우리’입니다. 나약함이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약함을 인간의 약점을 이긴 그리스도 안에 둘 때, 그곳을 향해 무릎 꿇을 때, 우리는 변화, 성장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존 러 파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방문한 니코데모’.

16절은 마음에 품어야 할 말씀입니다. ‘너무나’로 번역된 이 단어는 사랑의 정도를 강조할 때 쓰이고, 사랑의 방식을 강조할 때는 ‘이런 식으로’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처음 나와 요한복음 전체에 점진적으로 심화되는 이 사랑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행하고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을 통하여 나에게 선물로 오셨고, 아들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아버지의 생명입니다.(17-21절) 그 생명을 찾고 살고 나누어야겠습니다.

‘너’를 나의 대상이나 나의 목적을 위해 대한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도 얻지 못합니다. 한평생 부부가 함께 살고도 그 배우자를 모를 수 있고, 한평생 신앙생활을 하고도 하느님을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럼 자신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와 함께 머무르지 않는다면 결코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어둠에 갇힌 것입니다.

아들을 받아들였다면 이미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구원의 주도권에 대한 한 자락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구원과 심판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판결이라기보다는 내 마음에 누가 있는지 드러나는 일입니다. 말씀이 생명으로, 그 생명이 빛으로, 나의 내면에서 밖으로 발산된다면 그는 이미 구원을 완성하는 여정에 있습니다.(1,5.9-11) 어둠은 빛과 근원적으로 대립되는 관계로서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나간 상태에 자신을 스스로 가두고 있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결정하는 것은 또 어둠일 뿐입니다. 이는 파멸의 운명입니다. 그 이유는 그의 행위들이 나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업적이 나쁜 것은 빛의 영향에 있지 않음을 말합니다.

니코데모가 밤에 찾아왔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밤 일수도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상징적인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가 어두움 중에 있었지만 빛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아직도 많은 부분을 “했느냐” “하지 못했느냐”라는 외적인 것에 묶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정녕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갈망하느냐?’(열망했느냐?)에 따라 하루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회개란 참 자아를 찾기 위해 아버지의 방향으로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만든 이가 내가 아니라 바로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빛이 그곳을 비추고 생명의 힘이 우리를 재촉합니다. 오늘 말씀의 화답송을 기억하며 아버지께 되돌아 갈 수 있는 용기를 냅시다.

“내가 만일 너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너를 가장 큰 기쁨으로 삼지 않는다면….”


김혜숙 선교사
교황청립 라테라노대학 신학과, 교황청립 안토니오대학 영성학과를 졸업하고,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스도 왕직 재속 선교사회’ 회원이며, 현재 교황청립 혼인과 가정 연구를 위한 요한 바오로 2세 대학 한국 책임자로 활동하고 있다.


                                                                    " Peace be with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