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고백소 안에 들어오신 할머니가 이렇게 고백하시는 적이 있습니다. “에구, 신부님, 사는 게 죄지유.” 이
러시면 참 난감합니다. “그럼, 살지 마셔유.” 그럴 수도없고…. 그런데 오늘은 할머니의 그 말씀을 곰곰이 묵상
해보게 됩니다. 살면서 나도 모르게 짓는 죄가 있을 수있다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우리는 자판기 주위에서 커피를 마시며 아프리카에 굶어 죽는 어린이들이 많다는 얘기를 하며 불쌍해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모릅니다. 근래 남미 아마존강 유역의 나무들이 너무 많이 벌목되어 그곳에 구름이
생성되지 않아 아프리카에 비가 안 오고 사막화가 진행되어 농토가 줄어든 아프리카 사람들이 굶주리게 된다
는 것인데, 지금 우리가 한번 쓰고 버리는 자판기 종이컵의 원료가 바로 그 나무라는 것을. 우리는 아침 출근 꽉막힌 길, 승용차 속에서 방글라데시에 홍수가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뉴스를 접하곤 ‘왜 그 가난한 나라는 늘 불행한 일만 닥치는 거지?’ 하며 동정의 마음을 갖습니다. 바로 그 시간 내 차에서 나오는 배기가스가  지구온난화를 촉진하여 빙산이 녹고 해수면이 올라가 저지대인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들에 홍수가 발생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또한 음식 쓰레기를 그렇게 많이 버리면서 식수 오염을 걱정하고, 살빼기 위해 러닝머신을 뛰면서 북한의 탈북난민들이 시장바닥 음식쓰레기를 주워 먹는 텔레비전 장면을 보기도 합니다.
내가 써버린 종이컵이, 내 승용차가 내뿜는 배기가스가, 내가 버리는 음식쓰레기가, 나의 과식이 세상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잘하지 못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 부릅니다. 방금 말씀드
린 우리의 무감각, 무관심, 편의주의가 만들어 내는, 나도 모르는 죄가 바로 ‘세상의 죄’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의 죄도 아니고 너의 죄도 아니라고 생각되고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지만 분명히 피해자가 존재하는 그런 죄 말입니다. 그 죄를 없애시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작은 이기심과 무관심이 자라고 퍼져 나가면 엄청난 파괴의 힘으로 힘없는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세상의 죄의 파도를 막기 위해 죄 없으신 몸으로 홀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는 희생의 길이 세상의 죄를 없애는 길임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십자가 희생의 길이 돌 같은 이기심과 무관심으로부터 살 같은 양심을 일깨우는 길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길을 갈 차례입니다. 이 시대는 가히 빈익빈 부익부의 시대이고 기회 불균등의 시대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또다시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면서도 십자가의 길을 가셨지만, 우리는 죄가 있기 때문에 당연히 십자가의 길을 가야합니다. 이 시대 우리의 죄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먹은 죄가 아닐까요?
           고찬근 루카 신부 / 서울대교구 성소국장